고향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40년쯤 전 얘기다. 마을 처녀가 군에 가 있는 청년에게 절교의 편지를 썼다. 한 마을에서 은밀히 사랑을 나누어 오던 사이였다. 제대하고 결혼하기로 둘은 약속했으나 청년이 제대하기 직전 처녀에게 그만 오해가 생기고 말았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면 어디서든 오해란 있다.

처녀의 오해도 그만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애인 사이에선 종종 하찮은 문제가 심각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절교의 편지를 띄웠던 것인데, 며칠 안 가 처녀는 자신의 오해였음을 깨닫고 후회했다. 사과의 편지가 군에 당도하기도 전 청년은 제대를 했다. 편지가 오가는 데는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군에서 제대한 청년은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전과 다름없이 처녀를 대했다. 미안하고 고마웠던 처녀는 청년을 남편으로 받아들였다.

남편이 그토록 너그러울 수 있었던 사정을 아내는 1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홧김에 써 보냈던 절교의 편지가 신작로 옆 보리밭 두렁에서 빛바랜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우체국에 가 편지를 부치지 않고 우체부에게 부탁하던 시절이었다. 우체국이 너무 멀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우체부였다. 맘씨 착했던 우체부에게도 어쩔 수 없는 습벽 하나가 있었으니, 들밥 먹는 농부들이 권하는 농주를 사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취해서 편지를 흘리는 바람에 두 남녀의 애정전선에 아무 이상 없었다는 얘기.

이메일이나 휴대폰 문자 메시지라면 어떨까. 시쳇말로 '빛의 속도'로 오가는 편지. 뭔가를 후회할 시간이 없다. 감정도 싸움도 빛의 속도로 오가며 눈덩이처럼 커지기만 할 테니까. 빠르고 편리한 매체환경이 이별까지 빠르고 편리하게 앞당기는 것은 아닐지.

빠르고 편리한 것은 우리에게 그 만큼의 여유와 즐거움을 주어야 할 텐데 새벽 두세 시까지 잠들지 못하고 복잡한 일에 얽매이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래서일까. 느리고 불편한 삶을 옹호하려는 주장과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주목받고 있다. '오래된 미래' '저발전의 발전'이란 모순된 말의 조합이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하다.

느리게 걸으면 많을 것을 자세히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편리한 패키지여행보다 고생스런 배낭여행을 택함으로써 낯선 지역의 풍토와 문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기억하려 한다. 촬영 현상 인화라는 기다림의 과정을 통해 사진의 피드백 효과를 높이려는 사람들은 디지털 카메라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회초리를 일부러 찾기 힘든 곳에 둔다고 한다. 아이에게 매를 대기 전에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고 한다. 매를 대야겠다고 흥분하는 나, 매를 찾으며 이런 저런 생각을 궁굴리는 나, 매가 아닌 말로 타이르자고 결심하는 나, 그 모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빠르고 편리하고자 하는 욕망은 기술과 문명에 의해 현실화된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욕망은 매체(媒體)에 의해 실현된다. 그러나 기술과 문명이 우리를 복잡하고 고단한 삶으로 이끄는 일면이 있듯, 빠르고 편리한 매체는 시차를 두고 다양해지는 우리 안의 여러 자아를 서로 기만하고 배반하는 위험에 지속적으로 노출시킬 위험이 있다.

그 모든 '나'를 인정하고 통합하려면 어쩔 수 없이 소요되는 시간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느리고 불편해질 수밖에 없으나 그것을 감응의 느림, 체득의 불편함으로 이름할 수는 없을까. 이것이 고향 마을 보리밭 편지 사건을 '불성실한' 우체부 얘기만이 아닌 향수어린 어린 날의 재밌는 사연으로 추억하는 까닭이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 쉬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은 침체되지 않고 계속 발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끼 없는 돌처럼 삭막한 것도 없다.

구효서 <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