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사회운동가 유아사 마코토(湯淺 誠)는 《反빈곤》이란 책을 통해 요즘의 일본을 미끄럼틀 사회로 규정했다. 1990년대 버블경제가 붕괴된 이후 중산층이 무너지고, 비정규직과 실업자가 급증하면서 국민 생활 수준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워킹푸어가 증가하고 사회 활력도 크게 둔화됐다고 지적한다.

미끄럼을 타고 있는 것은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실업률이 치솟고 있는 데다 취업을 해도 비정규직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전반적 생활 형편은 후퇴일로다. 2007년의 금융위기를 계기로 부동산과 주가에 형성됐던 버블이 빠져나가면서 경제가 고꾸라진 탓이다.

전 세계적으로 일자리 만들기야말로 경제정책의 알파요 오메가라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도 그런 이유다. 일자리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자칫 정권마저 내놓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내몰릴 처지다. 스페인을 비롯한 일부 남유럽 국가에서 정권의 지지도가 급격히 추락하고 있는 게 이런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각국 정부가 재정 형편이 좋지 못한 상황에서도 일자리 확대를 위해 공적 자금을 퍼붓는 등 안간 힘을 쓰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이치다. 특히 미국 오바마 정부의 노력은 필사적이다. 10% 선을 오르내리는 실업률을 끌어내리기 위해 전방위적 노력을 동원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상 처음으로 수출진흥 내각을 구성키로 한 점이다. 향후 5년간 수출을 두 배로 늘려 일자리 200만개를 창출하겠다고 공언했다. 정부 공사에 미국 제품을 우선 구매하는 바이 아메리칸 정책에 이어 수출드라이브까지 걸고 나왔으니 통상마찰이 심화될 게 불보 듯 뻔하다. 강력한 위안화 절상 압력으로 미 · 중 관계 악화가 초래된 것도 그런 연장선 상의 일이다. 고용 확대를 위해서라면 다른 나라 일자리를 뺏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엿보인다.

그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도요타 자동차 사태 또한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물론 차량 결함이 도요타 측에 근본적 책임이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미국 정부와 언론의 도요타 두들기기를 보노라면 혹시라도 자국업체를 살려 고용 확대를 도모하려는 노력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만일 그런 배경이 숨어있다면 한국 기업 또한 다음 타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긴장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정들을 생각하면 해외 시장에 힘입어 우리 경제와 고용사정이 단시일 내 호전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사실상 백수'가 수백만명에 이르는 게 우리의 현실이고 보면 정말 보통 걱정이 아니다. 따라서 일자리 나누기를 통한 고용확대 방안이라도 적극 강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일자리 나누기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점은 근로시간을 살펴보면 드러난다. 우리나라 근로자들은 2007년 현재 연간 2316시간을 일해 OECD국가들의 평균치를 548시간이나 웃돈다. 2000시간을 넘는 것은 우리가 유일하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고용 확대를 꾀할 여지가 상당하다는 뜻이다.

정치권에서도 최근 이런 점에 주목하고 근로시간 단축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근로자들의 소득 감소가 수반되는 데다 기업들의 참여도 전제돼야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정부는 물론 재계와 노동계도 전향적인 자세로 나설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고용확대를 도모하면서도 기업과 근로자들의 이해를 조화시킬 수 있는지 지혜를 모으고 접점을 찾아 나가야 한다. 한국에서도 미끄럼틀 사회라는 말이 나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봉구 수석논설위원 b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