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생명의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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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에 함박눈이 내리던 날이다. 늦은 점심을 먹고 산책 삼아 눈 내리는 숲길을 걸었다. 눈발이 제법 굵어지는가 싶더니 금세 온 하늘을 덮었다. 숲길에는 깊은 정적이 감돌았다. 내 발자국 소리와 숨소리가 숲 끝까지 울려 퍼졌다. 평화로웠다.
문득 초등학교 2학년 어느 겨울 아침이 생각났다. 할머니 생신날을 깜박 잊은 어머니가 미역국에 넣을 고기가 없다며 내게 급히 심부름을 시키셨다. 함박눈이 내리는 새벽 숲길은 오늘처럼 깊은 침묵에 싸여 있었다. 추위로 코끝이 시렸지만 아늑하고 평온했다. 누군가 나를 보호해 주는 듯했고,마치 내가 눈길 위를 반 뼘쯤 떠서 미끄러지는 듯 달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생명의 느낌이었다. 내가 주위의 살아 있는 모든 것들과 연결돼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눈발에 가려 앞이 잘 안 보였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어린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이웃마을 푸줏간까지 한달음에 다녀왔다.
내 발소리마저 숲의 정적을 방해하는 것 같아 잠시 멈추어 서보았다. 침묵에 잠긴 숲의 생명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른 자작나무와 아름드리 소나무,키 작은 산죽(山竹).모두 의연히 눈을 맞고 서 있었다. 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추운 겨울을 묵묵히 나는 그 생명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 생명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갈까. 생명에 대한 경외와 감사함으로 한참을 겨울나무들과 함께 서 있었다. 흩날리는 눈송이는 생명의 열정을 축복하는 꽃송이 같았다.
우리의 생명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살아가는 동안 그 생명을 무엇을 위해,어떻게 쓸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책임이 있다. 과거는 이미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의 손길이 미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지금 이 순간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자각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나에게 주어진 육체와 인간관계,나의 성격 등은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나에게 조건으로서 주어져 있다. 그 조건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그것을 바탕으로 더 나은 삶을 창조해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몫이다. 들판의 나무를 보라.나무는 거친 땅에 태어남을 탓하지 않고,종자가 무엇이든,환경이 어떠하든,어떻게 쓰이든 최선을 다해 자기 몫의 생명을 꽃피운다.
우리는 매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이 새로운 조건을 만들고,그 조건은 또 새로운 선택을 요구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인생이 창조된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때로 피할 수 없는 고통도 따르지만,생명이 있다는 것,살아간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 아름다운 생명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쓸까. 우리가 생명에 대해 품을 수 있는 가장 멋진 화두다.
이승헌 글로벌사이버대 총장 ilchi@ilchi.net
문득 초등학교 2학년 어느 겨울 아침이 생각났다. 할머니 생신날을 깜박 잊은 어머니가 미역국에 넣을 고기가 없다며 내게 급히 심부름을 시키셨다. 함박눈이 내리는 새벽 숲길은 오늘처럼 깊은 침묵에 싸여 있었다. 추위로 코끝이 시렸지만 아늑하고 평온했다. 누군가 나를 보호해 주는 듯했고,마치 내가 눈길 위를 반 뼘쯤 떠서 미끄러지는 듯 달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생명의 느낌이었다. 내가 주위의 살아 있는 모든 것들과 연결돼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눈발에 가려 앞이 잘 안 보였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어린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이웃마을 푸줏간까지 한달음에 다녀왔다.
내 발소리마저 숲의 정적을 방해하는 것 같아 잠시 멈추어 서보았다. 침묵에 잠긴 숲의 생명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른 자작나무와 아름드리 소나무,키 작은 산죽(山竹).모두 의연히 눈을 맞고 서 있었다. 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추운 겨울을 묵묵히 나는 그 생명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 생명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갈까. 생명에 대한 경외와 감사함으로 한참을 겨울나무들과 함께 서 있었다. 흩날리는 눈송이는 생명의 열정을 축복하는 꽃송이 같았다.
우리의 생명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살아가는 동안 그 생명을 무엇을 위해,어떻게 쓸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책임이 있다. 과거는 이미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의 손길이 미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지금 이 순간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자각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나에게 주어진 육체와 인간관계,나의 성격 등은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나에게 조건으로서 주어져 있다. 그 조건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그것을 바탕으로 더 나은 삶을 창조해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몫이다. 들판의 나무를 보라.나무는 거친 땅에 태어남을 탓하지 않고,종자가 무엇이든,환경이 어떠하든,어떻게 쓰이든 최선을 다해 자기 몫의 생명을 꽃피운다.
우리는 매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이 새로운 조건을 만들고,그 조건은 또 새로운 선택을 요구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인생이 창조된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때로 피할 수 없는 고통도 따르지만,생명이 있다는 것,살아간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 아름다운 생명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쓸까. 우리가 생명에 대해 품을 수 있는 가장 멋진 화두다.
이승헌 글로벌사이버대 총장 ilchi@ilch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