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1만3000여명의 필리핀 라푸라푸섬은 절애고도(絶崖孤島) 그 자체였다. 관문항인 레가시피(Legazpi)섬에서 동쪽으로 소금쟁이처럼 생긴 '방카(bangka,타갈로그어로 배)'라는 50인승 목선을 타고 4시간여를 파도와 싸운 끝에 도착했다. 마닐라로부터 거리는 375㎞.LG상사와 광물자원공사가 70%의 지분을 보유,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광산은 섬 동쪽 끝자락 해변에 자리잡고 있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한국인 4명이 반가운 얼굴로 맞는다. 박영태 법인장 등 LG상사 직원 3명과 기술 자문을 맡고 있는 광물자원공사 직원이다. 며칠째 쏟아부은 비 탓에 동,아연이 섞여 있는 노천 광산은 커피빛 속살과 닮았다. "꼭 간첩처럼 생겼죠? 새벽녘 방카에 앉아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두운 바다를 달리고 있으면 영락없이 간첩이에요. " 이들은 5일 동안 고립무원의 섬에서 일하다 주말에야 마닐라의 숙소로 돌아간다.

크리스마스를 1주일 앞둔 지난달 18일,라푸라푸 광산은 파티를 즐기는 1000여명의 필리핀 근로자들과 피노사완,말로바고,파그콜본 등 인근 마을에서 온 주민들로 하루 종일 떠들썩했다. LG상사가 광산 운영을 맡은 지 1년6개월,그 짧은 시간에 어업으로만 생계를 연명하던 마을은 인근 섬 주민들의 부러움을 독차지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2008년 5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마을에 전기조차 안 들어오는 곳이 허다했습니다. 폭우로 휩쓸려 간 다리는 끊어진 지 오래라 또 한번 태풍이 오면 자칫 마을 주민들이 고립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 기존 운영업체인 호주 라파예트사가 폐수 유출 사고를 내는 등 지역 여론도 악화돼 있었다.

박 법인장과 한국인 직원들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먼저 지역 주민들에게 다가갔다. 월 광산운영비의 1%를 무조건 떼내 섬 주민을 위해 쓰기로 한 것.발전기를 들여 놓고,레가시피 섬에서 전기선을 끌어와 밤 하늘을 밝혔다. 끊어진 다리는 다시 잇고,화장실도 수세식으로 모두 교체했다. 박 법인장은 "쓰레기 분리 수거하는 방법까지 알려줬을 정도"라며 "앞으로는 한글 교실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광산 근로자 가운데 섬 주민 출신이 2007년까지 불과 10%에 불과했으나 LG상사가 운영을 맡은 이후 절반으로 늘었다.

라푸라푸 광산에서 나오는 동 정광,아연 정광은 미세한 분말 형태로 니꼬동제련 고려아연 등 국내 업체로 들어온다. 한국 기업이 개발,운영하는 광산에서 구리와 아연을 들여오기는 처음이다. 박 법인장은 "라푸라푸 광산이 한국의 광물 자주개발률에 기여하는 역할은 막중하다"며 "추가 탐사도 계속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LG상사 직원들이 시트에 절은 땀 냄새 때문에 숨쉬기도 힘든 4륜 지프를 타고 매일 정글을 누비는 이유다.

가족도 없는 낯선 타향,박 법인장의 소일거리는 무엇일까. "바닷속에 들어가는 게 유일한 낙입니다. 얼마 전에 스킨스쿠버 자격증도 땄어요. 비바람 몰아칠 땐 악몽처럼 무섭다가도 요즘처럼 맑은 건기 때 바닷속은 그야말로 천국이거든요. 바닷속 생물들이 잘 살고 있는지 살피는 것도 중요한 일 중 하나예요. 폐수가 바다로 유입되는지를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거든요. "

라푸라푸(필리핀)=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