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절정이다. 어느새 노랗게 변한 나뭇잎이 바람과 함께 눈처럼 흩날린다. 겨울이 멀지 않은 것 같다. 한 해가 정신없이 흘러간다. 새벽 출근길에 아파트 한쪽에서 낙엽 태우는 장면을 봤다. 낙엽이 한줌의 재가 되는 순간이었다.

얼마 전 오랜만에 동창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인터넷 애호가였던 동창 A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결혼 전 사귀던 친구와 함께 찍었던 사진이 배우자에게 알려져 곤경에 빠졌다는 얘기였다.

A는 대학시절부터 인터넷 동호회 카페에서 운영자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하나의 아이디로 각종 게시판이나 사이트에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인터넷 쇼핑몰 사용 후기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다 한 이벤트에 당시 사귀던 친구와 찍은 여행사진을 응모했다가 당첨되었는데,그 사이트에서 10여년 전의 사진을 그대로 남겨 두고 있었다는 것.그 일이 있고 난 후 A는 인터넷에서 본인의 흔적을 찾아다니며 몇 년씩 묵은 게시물과 사진을 삭제했다. A는 아무 생각없이 남겨 두었던 흔적들에 대해 무척 속상해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아이디나 메일로 검색을 하면 한 사람의 과거 흔적,심지어 신상명세까지 떠오른다. 인터넷을 떠도는 이들은 헨젤과 그레텔처럼 과자(쿠키)를 흘리고 다닌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쿠키(cookie · 인터넷 접속시 PC의 하드 드라이브에 저장되는 사용자의 인터넷 이용 정보)라는 기술이 그것이다. 접속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여기저기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터넷상에서 익명이란 이유로 우리의 흔적에 방심했는지도 모른다. 인터넷 그물망이 그토록 촘촘하고 단단할 줄 몰랐던 것이다. 인터넷에 접속하거나,교통카드를 사용하거나,휴대폰을 휴대하기만 해도 디지털 흔적을 남기게 된다.

찾고자 노력한다면 네트워크라는 전 지구적인 신경통신망에 걸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넷에서 완벽한 익명성을 보장받기는 쉽지 않다. 물론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 생각과 행동의 자유는 마음껏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다. 일상생활에서 인터넷 공간의 비중은 커져가고 있다. 이제 디지털 흔적에 대한 '관리'가 중요한 세상이 됐다. 디지털 흔적을 '보호'하는 것과 디지털 산업을 '활성화'하는 일의 '균형성'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다.

가상공간에서 삶의 모습도 한 사람의 살아간 흔적이고 자취에 포함된다. 경계없는 세상에서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고 싶은 게 우리의 본능이다. 흔적없이 재로 사라지는 낙엽처럼 디지털 세상에서는 아무렇게나 원할 때 그것을 태워버릴 수도 없기에….학창시절 책갈피 속에 끼워둔 마른 단풍잎 같은 흔적과 추억을 꺼내보고,디지털 공간에서 만난 정겨운 친구들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김희정 < 한국인터넷진흥원 원장 khjkorea@kisa.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