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문무왕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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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실록을 보관하던 서울 춘추관과 충주 전주 성주 등 네 곳 사고(史庫) 중 서울 충주 성주는 임진왜란 때 불타고 말았다. 전주사고 실록이 보존된 것은 전라도 태인의 선비 안의와 손홍록이 내장산으로 옮긴 덕이다. 두 선비는 집안사람들을 동원해 실록을 산속에 숨기고 14개월 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지켰다고 한다.
일제 강점시대 도굴꾼과 골동상들이 일본으로 빼돌리려 했던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이는 간송 전형필(1906~1962)이다. 10만석지기 갑부였던 간송은 재산을 문화재에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일본상인이 갖고 있던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을 비롯 훈민정음 해례본,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명품들을 수집했다. 이들 문화재는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보관돼 있다.
귀한 문화재가 우연히 발견되는 일도 적지 않다. 백제 고고학의 최대 성과로 평가되는 공주 무령왕릉은 1971년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됐다.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誌石) 2매를 비롯 발받침,베개 등 국보급 유물이 출토돼 백제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됐다. 1966년에는 석가탑을 해체 보수하던 중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오기도 했다. 도굴꾼이 밤에 석가탑 내부의 유물을 훔치려다 지붕돌이 떨어지자 도망간 사건을 계기로 해체하게 됐으니 묘한 인과관계다.
조선시대에 발견됐다 사라졌던 신라 제30대 문무왕릉비 일부가 경북 경주 동부동에서 200여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발견 과정이 재미 있다. 한 수도 검침원이 김윤근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으로부터 야간수업을 받던 중 "포항 중성리에서 가장 오래 된 신라 비석이 최근 발견됐으니 주변을 잘 살펴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마전 검침했던 집 수돗가 돌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국립경주박물관의 현지조사 결과 문무왕릉비의 윗부분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표면과 가장자리가 심하게 마모됐지만 비문 내용을 읽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비석 아랫부분은 1961년 발견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문화재는 깊은 관심과 애정이 뒤따라야만 발견되고 보존된다. 숱한 자연재해나 전란,밀반출 시도 속에서도 우리 문화재가 이만큼이나마 보존돼온 것은 이를 지켜내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우리 역사가 사실(史實)로서의 가치를 더하며 생생하게 살아나는 게 아닐까.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일제 강점시대 도굴꾼과 골동상들이 일본으로 빼돌리려 했던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이는 간송 전형필(1906~1962)이다. 10만석지기 갑부였던 간송은 재산을 문화재에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일본상인이 갖고 있던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을 비롯 훈민정음 해례본,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명품들을 수집했다. 이들 문화재는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보관돼 있다.
귀한 문화재가 우연히 발견되는 일도 적지 않다. 백제 고고학의 최대 성과로 평가되는 공주 무령왕릉은 1971년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됐다.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誌石) 2매를 비롯 발받침,베개 등 국보급 유물이 출토돼 백제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됐다. 1966년에는 석가탑을 해체 보수하던 중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오기도 했다. 도굴꾼이 밤에 석가탑 내부의 유물을 훔치려다 지붕돌이 떨어지자 도망간 사건을 계기로 해체하게 됐으니 묘한 인과관계다.
조선시대에 발견됐다 사라졌던 신라 제30대 문무왕릉비 일부가 경북 경주 동부동에서 200여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발견 과정이 재미 있다. 한 수도 검침원이 김윤근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으로부터 야간수업을 받던 중 "포항 중성리에서 가장 오래 된 신라 비석이 최근 발견됐으니 주변을 잘 살펴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마전 검침했던 집 수돗가 돌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국립경주박물관의 현지조사 결과 문무왕릉비의 윗부분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표면과 가장자리가 심하게 마모됐지만 비문 내용을 읽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비석 아랫부분은 1961년 발견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문화재는 깊은 관심과 애정이 뒤따라야만 발견되고 보존된다. 숱한 자연재해나 전란,밀반출 시도 속에서도 우리 문화재가 이만큼이나마 보존돼온 것은 이를 지켜내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우리 역사가 사실(史實)로서의 가치를 더하며 생생하게 살아나는 게 아닐까.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