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한 60대 남편이 집에서 하루 한끼도 안 먹으면 영식님이고,한끼만 먹으면 한식씨이고,두끼를 먹으면 두식놈,세끼 다 먹으면 삼식이새끼라는 구박도 받아가며,늙은 아내와 함께 사는 그의 일과는 양품가게 차린 며느리가 맡긴 손자를 봐주는 일이다. 대개는 아내가 돌봐주기 때문에 손자 재롱만 즐기다가,아내가 외출하면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 그네를 밀어주거나,다치지 않도록 지켜봐 주고,용변시중을 들어주고,TV채널을 돌려주거나 그림 동화책을 읽어주고,계란도 삶아주는 등 간식을 먹이고 놀아주는 일이다. 그러다가 외출한 아내가 돌아오면 손자보육의 일과에서 해방된단다.

모임이 있는 날은 친구들과 만나 만원씩을 내놓고 서로 손자자랑을 하고는,모인 돈으로 점심 사 먹고 차도 마시고,마누라 흉보기라는 미명으로 입만 열면 아내가 시켰다느니 아내가 해준 보약을 먹는다느니 등의 팔불출 짓을 일삼고는 기분 좋게 헤어져 귀가하는데,그런 때마다 손자 없는 친구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한다나. 물론 늙은 아내구박(?) 얘기도 행복투정이어서,홀아비친구도 처량해 보여,처복(妻福)이 상복(上福)이라거나,열 효자도 악처 하나만 못하다는 옛말을 새겨보게 된다나.

미혼 시절의 그는 결혼식장에서조차도 옆에 선 신부가 사랑하는 롯테였으면 하고 바랐다고 했다. 며느리만은 내 맘대로 고른다는 어머니를 거역 못했던 그는,죽을 만큼 사랑한 샤를 브프 롯테를 포기해야 했지만,죽지도 못하고 어머니의 명에 따랐던 슬픔 이상의 불행한 젊은 베르테르였다. 나쁜 남편에다 제 자식에게도 관심 둔 적 없이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애쓸 뿐이었던 나쁜 아비였지만,아이들은 평범하게 자라주었고,때 되어 호랑이 같던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손자도 얻었다고 했다.

가끔은 놓쳐버린 샤를 브프 롯테를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그런 생각조차 점차 희미해져가면서,시아비가 되고 장인이 되었고,퇴직도 하게 되었다고.그러나 쉬지 않고 발등에 떨어지는 불끄기에도 바빴던 고비마다 그도 성장했던 모양이라고.돌이켜보면 사람이야말로 적응의 명수라고,다들 서로 손자 외손자 자랑하느라고 세종대왕 한 장씩을 아낌없이 내놓으면서 즐거워 할 뿐만 아니라,거기에다 마누라 흉보기에도 만원 한 장씩을 더 얹어서 내놓기를 주저하지 않으니,그야말로 늙은 베르테르의 기쁨이 아니겠느냐고 웃어댔다.

어느새 창문을 닫고 자게 된다. 절대로 식을 것 같지 않던 폭염 속으로도 가을이 오고 있었나 보다. 짙푸른 잎새도 누리끼리 불그죽죽 변색될 것이고 새파란 땡감도 붉게 익어 갈 테니,사람이야 말해 뭣하랴.가치도 신념도 소신 철학도,연륜과 함께 변하고 마는 것을.사랑 외에 가치 있는 아무것도 없다던 젊음은 언제였나,노년의 손자 재롱이나 편안하고 덤덤한 부부애만이 기쁨이 되어버렸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멍청한 짓 잘 하는지,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다는 우리나라란다. 이유가 무엇이건 세월에 맡기고 자살하지 말자.세월은 흐르게 마련이고,그러는 사이에 상황은 바뀌고,제 스스로 먼저 바뀌기도 하는데.

창밖의 귀뚜라미 소리도 어느 결에 무릎과 발목의 복사뼈에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절체절명이던 꿈도 야망도 사랑마저도 덧없고 속절없어,무엇하다 이렇게 늙어왔나 허망할 때,그래도 살아놓은 거라곤 눈앞에서 꼬물거려주는 손자이다. 잔소리와 구박도 안 들리면 집안은 적막강산이 되게 길들여준 노처(老妻)가 있다는 것도,늙은 베르테르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단다. 65세 이상 인구가 770만명을 넘었다는 우리나라,늙는 게 아니라 익는 것이다. 인생답게 맛이 들고 깊어지는 것이다. 늙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누리는 장수(長壽)도 관광상품이 될 순 없을까?

유안진 <시인ㆍ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