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정몽헌-현정은 `대북사업'에 열정

현정은 회장이 10일 평양 방문길에 오르면서 남북관계가 경색과 위기 국면을 맞을 때마다 현대그룹이 맡아온 역할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현 회장은 2박3일간의 이번 방북 기간에 북측 인사들과 북한에 억류된 현대아산 직원 유모씨 석방, 나포된 '800 연안호' 선원 송환 문제, 금강산 관광 재개, 개성공단 사업 등의 현안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남북 관계 정상화에 대한 메시지를 받아올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일이 잘 풀리면 오랜 기간 막혔던 남북 당국 간의 대화 채널이 되살아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대북 문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현대그룹이 대북 관광사업을 통해 남북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튼 것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 때부터다.

정 명예회장은 1989년 1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만나 금강산 관광 사업의 기초가 된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체결했다.

이후 대결적 남북관계를 뚫고 1998년 6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친 '소떼 방북'으로 금강산 관광사업을 성사시켰다.

금강산 관광으로 물꼬가 트인 현대의 대북사업은 남북 영농사업, 평양체육관 건립, 남북농구경기대회, 서해안 공단개발 사업 등으로 발전했고, 1999년 10월 정 명예회장은 김정일 위원장과 두 번째 면담을 했다.

금강산 관광을 비롯한 현대의 대북사업은 단순히 일개 대기업의 사업영역을 떠나 남한 정부의 강력한 화해 의지를 보여준 결과물로 평가받았다.

1999년 제1차 연평해전에도 불구하고 이듬해인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도 금강산 관광사업에서 구축된 신뢰가 있어서 가능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북 사업의 상징적 존재가 된 현대그룹은 1999년 대북 관광을 주 사업으로 하는 현대아산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대북사업을 이어왔다.

현대아산은 2000년 8월 금강산.개성 특구 지정 및 인프라 사업권을 북측과 합의하면서 북측의 사업파트너로 성장했으며, 2002년 9월에는 경의선.동해선 철도 및 도로 연결사업을 착공했다.

2002년 11월 금강산, 개성 특구법이 채택되면서 현대아산은 이들 지역에서 관광 및 공단 조성 사업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고, 2003년 6월 개성공업지구 착공에 이어 2003년 8월에는 금강산 육로관광이 시작됐다.

2003년 10월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을 완공해 남북간 화해 협력에 기여했고, 2004년 6월 개성공업지구 시범단지 준공, 2005년 6월 금강산 관광객 100만명 돌파, 2005년 8월 개성관광 시범관광, 2007년 12월 본 관광 시작의 성과를 잇따라 올렸다.

정 명예회장이 별세한 후에는 아들인 정몽헌 회장이 대를 이어 대북사업을 열성적으로 추진했으나 '대북송금 문제'가 불거지고 정 회장이 특검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대북 관광사업은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러나 정 회장의 부인인 현정은 회장은 시부와 남편의 유지를 이어받아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대북사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현대그룹은 2005년 현 회장과 김운규 전 부회장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북한이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파트너였던 김 전 부회장의 퇴장에 반발하면서 사업 중단 위기를 맞았고, 이듬해에는 미국 정부가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의 '달러 파이프 라인'으로 금강산 관광사업을 지목하고 중단을 요구하면서 난관에 빠지기도 했다.

대북 관광사업은 급기야 지난해 7월 남측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군의 총격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중단돼 지금까지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

현 회장은 하지만 틈날 때마다 "단 한 명이 북측 관광지를 찾더라도 대북사업을 할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밝혀왔으며, 직원 유씨의 억류 사건으로 최악의 상황에 처한 대북 사업과 경색된 남북 관계의 개선을 위해 이번 평양행을 추진했다.

재계에서는 현대그룹이 `오너 회장'들의 열정으로 대북 사업을 키워왔다는 점에서 현 회장이 이번 방북을 통해 관계가 소원해진 남북 당국 간의 가교 역할을 어떻게 할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fait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