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직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주인아저씨가 쌀 한 가마와 팥 한 되를 자기 집으로 배달하라고 했다. 공교롭게 비까지 질척질척 내리는 날이었다. 무턱대고 쌀 가마니와 팥 자루를 자전거에 비끄러매고 비틀비틀 나섰는데 애초부터 무리한 짓이었다. 회원시장 근처에서 기어이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

고(故) 정주영 회장의 자서전 '이땅에 태어나서'에 나오는 쌀가게 점원 시절 얘기다. 글은 이어진다. '그날 밤 선배 배달꾼을 졸라 자전거 쌀 배달의 기술과 요령을 배워 사흘 동안 거의 밤잠을 안 자고 매달렸다. 나는 얼마 안 가 쌀 두 가마를 싣고도 제비처럼 날쌘 최고의 배달꾼이 되었다. '

자전거는 이렇게 맨손으로 고향을 떠난 정 회장이 서울에 뿌리를 내리고 기반을 잡은 밑바탕이 됐다. 정 회장만 그러했으랴.자전거는 그 시절 이땅 사람들에게 더없이 중요한 교통과 생계의 수단이었다. 지금도 자전거는 아이들의 등교 수단이자 서민의 자가용이요,건강과 스트레스 해소에 좋은 레포츠도구다.

바야흐로 자전거 시대다. 기름 없이 달리는 자전거가 녹색성장의 주역으로 각광받으면서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할 것 없이 자전거 이용 활성화를 위한 온갖 방안을 쏟아내고 있다. 자전거 전용도로 확충과 자전거 공용제 도입,주요 철도와 지하철역 등에 자전거 보관시설 설치 등.현재 1.2%인 자전거 교통수단 분담률을 5%대로 높이겠다는 목표다.

자전거 도시 조성을 위한 움직임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국토해양부가 인구 50만명 이상 시(市)의 공동주택에 자전거 보관소(100가구당 30대) 설치를 의무화한 '주택 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 데 이어 서울시도 평균 16층 이상,300가구 이상 아파트를 건설하자면 단지 안에 자전거 주차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침을 내놨다.

발상은 그럴 듯하다. 그러나 아파트에 살아본 사람은 다 안다. 지금도 단지 안에 자전거 보관대가 있지만 이용자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다들 멋모르고 새 자전거를 밖에 세워뒀다 분실한 적이 있는 까닭이다. 어른도 그렇지만 아이들은 새 자전거를 잃어버리면 어쩔 줄 몰라 한다. 경찰에 신고해봤자 소용없으면 아이들의 가슴엔 시퍼렇게 멍이 든다.

결국 관리사무소에서 아무리 말려도,앞집 옆집이 눈총을 줘도 올려다 현관 옆에 세운다. 아파트 마당 보관대에 세워진 것들은 주인이 내버리지도 않고 딱히 찾아가지도 않는 헌 것들로 장소만 차지한 채 천덕꾸러기가 돼 있다.

지하에 만들어도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지자체에 등록하면 분실과 도난 방지를 위한 RFID칩을 주는 방안을 추진한다지만 그 또한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 장담하기 어렵다. 게다가 자동차 진출로를 이용해 지하 주차장으로 드나들 경우 가뜩이나 적지 않은 주차장 사고가 더해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안전 대책도 큰 문제다. 자전거 도시라는 창원의 경우 인프라 확충으로 자전거의 교통수단 분담률이 종래의 6배로 늘었지만 그만큼 사고도 늘었다고 한다. 전국적으로도 최근 5년간 전체 교통사고는 12% 감소했지만 자전거 사고는 45% 늘어났다는 마당이다. 특히 사고 대부분이 '자전거와 자동차 간 사고'로 돼 있다.

자전거가 좋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문제는 편의성과 안전성 확보다. 기존 보도에 금만 그으면 자전거도로가 된다는 발상, 들고 날 때의 사고나 분실을 감안하지 않은 주차장 의무화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건 그런 까닭이다.

전용도로 확대도 중요하지만 도로교통법에 자전거 통행법과 우선순위를 규정하고 안전장구 착용을 의무화하며 사고 발생 때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도 필요하다. 자전거 이용자,자동차 운전자, 보행자 모두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 자전거 나라는 기대하기 어렵다.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아줘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