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세타가야구에 사는 회사원 하라 겐이치씨(53)는 지난 12일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 후보를 찍었다. 여당인 자민당에만 평생 투표해온 그였지만 이번엔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라씨는 "일본은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정권이 바뀌지 않으면 경기도,국민생활도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일본의 민심이 심상치 않다. 일본인 속성상 직접적인 의사표현을 안 해서 '촛불 시위'같은 게 없을 뿐이지 속으론 부글부글 끓고 있다. 이대로 가면 다음 달 30일 총선거에서 여당인 자민당이 참패해 정권이 바뀌고도 남을 분위기다. 이미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징조는 나타났다. 총 127석을 놓고 다툰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이 54석을 차지해 제1당이 된 반면 자민당은 38석을 건지는 데 그쳤다. 내달 선거에서 자민당이 지면 일본에선 2차대전 후 선거에 의한 사실상 첫 정권 교체가 된다.

일본 국민들은 '만년 여당'인 자민당에 왜 등을 돌렸을까. 오랜 여당의 한계를 못 벗어나고 긴장감없이 나태한 모습을 보인 게 일본 국민을 실망시켰다는 게 주된 지적이다. 올초 나카가와 쇼이치 재무상이 로마에서 '음주 회견'을 한 것이나,고노이케 요시타다 관방 부장관이 여성 스캔들로 물러난 것 등이 단적인 사례다. 이런 게 쌓여서 아소 내각과 자민당의 인기가 급락했다는 분석이다.

사실 자민당의 구태의연은 어제 오늘 일도 아니다. 그런 점에선 민심 이반의 근본 원인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바로 경기악화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보수적인 일본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최근 이를 뒷받침하는 통계가 나왔다. 통계수리연구소가 발표한 '일본인의 국민성 조사'에 따르면 생활이 빈곤해지고 있다는 응답이 전체의 절반을 넘는 57%에 달했다. 1953년 조사 이후 가장 높은 비율이다. 사회불만을 선거에서 투표로 반영시키겠다는 응답도 55%나 나왔다.

경기부양에 세금을 쏟아붓고도 쓸데 없는 데 쓰는 바람에 선진국 중에서 가장 경기회복이 늦고,정부의 연금관리 부실로 인해 미래가 더 불안해진 게 일본인들의 표심을 좌우했다는 얘기다. 1993년 분당 등으로 총선에서 자민당이 과반의석을 상실해 10개월간 정권을 놓쳤던 때도 거품경제 붕괴로 인한 불황이 배경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반대로 고이즈미 정권 시절인 2005년 총선에서 자민당이 이긴 데는 경기회복세가 큰 힘이 됐다.

물론 선거는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모른다고 한다. 총선까지는 40일이 남았기 때문에 판세가 뒤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이 일본 경제가 갑자기 좋아질 가능성은 없다. 자민당의 선거 전망이 비관적인 이유다. 자민당은 최근 코미디언 출신의 지방자치단체장을 영입해 인기를 만회하려다가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이게 지금 일본의 민심이다. 정치적 술수나 깜짝 쇼로는 국민들의 마음을 바꾸기 어렵다는 증거다.

자민당이 내달 총선에서 정권을 잃는다면 민심의 무서움과 함께 경제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국민들 배 부르고,등 따뜻하게 해주는 게 정치'라는 사실도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진리는 한국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도쿄=차병석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