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가 깊은 침체에 빠져 있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중국 고위 관료들과 여러 관영 매체 지도급 인사들의 인식을 확인할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지난 11일 베이징에서 열린 한 · 중 언론인 포럼에서다. 중국이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끌어올리겠다는 야심까지 드러낸 터라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미국이 주도한 불공정하고 무질서하며 비합리적인 국제금융체제가 위기의 본질'이라고 목소리를 높인 것은 예상대로였다. 선진 부국(富國)들이 만든,돈벌이만 추구한 금융시스템이 빚은 참극이라는 주장에 덧붙여,국제결제수단을 장악한 미국 등 몇 나라만 불공평하게 이득을 봐온 통화지배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한결같았다. 위안화의 기축통화 구상에 대한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서방언론의 비판에는 "너나 잘하세요"라는 식의 반응이었던 것도 새삼스럽지 않았고….

물론 위안화 기축통화론은 과욕임에 틀림없고,당분간 위안화가 호환성을 갖기도 어려울 것이다. 기축통화가 경제력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그 국가와 화폐가 갖는 글로벌 차원의 영향력과 신뢰성,안정성,보편성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중국과 위안화는 아직 그런 가치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세계가 공유하는 돈이 되려면 미국처럼 대량의 화폐를 찍어내고 바깥으로 유통시켜야 하지만,지금 중국경제의 힘은 거꾸로 세계 통화를 흡수하면서 키워진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의 야망을 가벼이 볼 수 없는 이유 또한 많다. 위안화의 국제화는 벌써 진행 중이고,무엇보다 중국이 추구하는 국가목표인 까닭이다. 중국은 이미 도광양회(韜光養晦,참고 기다리며 힘을 기른다)를 벗어나 유소작위(有所作爲,문제에 적극 개입해 뜻한 바를 관철한다)의 대외기조를 천명한 지 오래다.

위안화를 국제결제통화로 만들겠다는 중국의 확고한 의지가 결국 통화전쟁의 양상으로 진전된다면 우리로서는 그 파장을 피해갈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다. 중국과 우리 경제는 이미 너무 깊고 넓게 묶여 있는 까닭이다.

중국은 우리나라의 최대 교역대상국이다. 지난해 대중 수출은 914억달러로 수출총액의 21.7%를 차지했다. 2위 수출대상국인 미국의 2배,3위인 일본의 3배 규모다. 장차 "교역대금을 중국 돈인 런민비(人民幣)로 결제할 테니 받아라"하게 될것이다. 중국은 이미 상하이와 남부 4개 경제거점인 광저우 선전 둥관 주하이를 위안화 결제 시범도시로 정했다. 또 홍콩 대만에 이어 동남아국가연합(ASEAN) 10개 회원국들과 일부 위안화 결제를,러시아 브라질과는 상호 자국화폐 결제를 추진키로 했다. 한국이 그 공략대상이 될 날도 머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금융협력을 내세운 통화스와프도 그렇다. 지난해 말 한 · 중 양국은 기존 40억달러 스와프 규모를 300억달러로 늘렸다. 증액된 260억달러는 달러가 아닌 위안화로 교환된다. 한국에 달러가 부족해 외환위기를 맞게 되면 중국이 위안화로 지원한다는 얘기다. 이 통화스와프 협정을 놓고 신화통신은 "위안화 국제화를 향해 얼음을 깨는 발걸음(破氷之旅)을 내디뎠다"고 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중국은 한국 외에,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홍콩 벨로루시 아르헨티나와도 모두 6500억위안 규모의 통화스와프 협정을 체결했다. 이게 위안화를 국제결제통화로 만들고 주변국을 위안화 권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작위(作爲)'의 과정이다.

달러는 흔들리고 위안화의 공세는 갈수록 거세질 게 분명하다. 통화의 주도권 싸움이 가져올 혼란은 수출에만 기댄 우리 경제의 혼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중국이 달러 대신 위안화를 받으라고 요구할 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또 어떤 기회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추창근 논설실장 kunn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