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설씨(34)의 경장편소설 《나쁜 피》(민음사)는 빈속에 독주를 털어넣은 듯 얼얼한 기분이 드는 작품이다. 고물상이 모여 있는 허름한 천변 어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감내해야 하는 불행에 가슴이 저리다가도,자신의 고통을 해결해 보겠다고 시도하는 방식이 하나같이 못나거나 사악하기 짝이 없어 답답해진다. 선과 악,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도식적인 이분법을 적용할 수 없는 인물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소설의 주인공 화숙은 뭇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는 정신지체 어머니 아래에서 '아비 없는 자식'으로 태어나 악착같이 살았지만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쉬지 않았는데 겨우 빚잔치만 면했다"고 쓸쓸해한다. 그런데 화숙은 피해자이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불행의 씨앗을 뿌리는 가해자다.

그는 끝없는 거짓말과 애먼 화풀이로 주위 사람들까지 물귀신처럼 시궁창 속으로 끌어들인다. 화숙은 어머니를 범한 남자가 외숙모와 불륜관계라고 외삼촌에게 거짓을 고해 한 가정을 깨트린다. 어머니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은 외삼촌에게 저항하는 대신 힘없는 외사촌 수연을 학대한다.

다른 인물도 비슷하다. 이들의 몸에 흐르는 불행과 증오라는 거부할 수 없는 '나쁜 피'는 정면승부를 하지 못하고 우회적 방식으로 고통을 해결하려는 태도 때문에 더욱 짙어진다.

김씨는 "운명이라는 절대적인 힘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의 절망적인 넋두리와 변명을 담은 소설"이라고 말했다. "누구나 상처가 있습니다. 다만 고통의 절대치는 사람마다 다르지요. 어떤 사람은 팔이 부러지면 아파하지만 어떤 사람은 손가락 끝만 베여도 아파하잖아요. 사람마다 고통의 차이가 있듯,해결책 또한 자기 처지에 따라 다르게 나오겠지요. 어떤 방식으로든 상처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게 삶이잖아요. "

그런데 왜 화숙은 거짓말을 하고 수연을 괴롭히는 우회적 방식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려 했을까. 이에 대해 김씨는 "화숙은 자존감이 낮고 위축되어 있는 데다 피해의식도 강해 '내가 이만큼 당했으니 너희도 한번 당해봐라'는 식의 보상심리가 있는 인물"이라면서 "화숙의 거짓말은 정면승부를 시도할 수 없는 약한 인물이 택한 비열한 해결책"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김씨는 마지막에 희망의 출구를 열어놓는다. 이들은 '나쁜 피'를 남김없이 쏟아내고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나쁜 피'가 흐르는 사람들을 핍진하게 그려내는 김씨의 짧고 단호한 문장은 탁월하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