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존엄사 첫 인정] "치료를 계속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 존엄성 해쳐"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을 허용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옴에 따라 그동안 의료법상 제약 때문에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계속 치료함으로써 불거진 문제들이 대폭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칫 사회 전반에 생명 경시 현상이 확산될 우려도 적지않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 의료계는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대한의사협회는 "환자의 존엄한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과 회생 여부에 대한 의학적 판단을 존중해 회생 불가능한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을 대법원에서 최초로 허용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논평했다. 의협은 "이미 2001년 공표한 의사윤리 지침에 '연명치료 중단과 관련한 의료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회생 불가능한 환자의 확실한 의사표시에 의해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며 "이번 대법원 판결은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개략적 요건만을 판단하고 있으므로 사회적 합의를 거쳐 연명치료 중단의 요건과 의사의 의학적 판단 인정 범위 등에 대한 법적 · 제도적 장치를 조속히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존엄사 인정 판결이 나오게 된 배경은 1997년 서울시립 보라매병원의 한 의사가 가족의 요구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뗐다가 살인방조죄가 인정돼 2004년 대법원이 형사상 책임을 물어 유죄를 선고한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의료계는 끊임없는 이슈화를 통해 존엄사를 허용해 달라고 요구해 왔으나 그동안 법원과 사회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이 2000년 고령화사회(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전체의 7% 이상)에 접어든 데다 지난 2월16일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이 인공호흡기 같은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장기 기증을 한 사례가 나오는 등 죽음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이 바뀌면서 대법원 판결도 뒤집어졌다.

그동안 의료계에서는 연명치료 중단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서울대병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7년 1년간 이 병원에서 사망한 656명의 환자 중 15%에서 무의미한 심폐소생술이 실시됐고 85%는 현행법상으로 보호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이 심폐소생술을 거부했고 의료진이 이를 받아들여 연명치료가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판결로 의사들은 의학적 판단에 따라 회생 불가능한 환자의 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토대를 얻었다. 병원 측에서도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투입했던 의료인력 및 고급 의료장비를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치료 분야로 돌릴 수 있게 돼 의료자원 이용 및 병원 경영의 효율화를 기할 수 있을 전망이다. 환자와 그 가족들도 정신적 · 육체적으로 피폐해지고 막대한 의료비 부담으로 고통받는 문제에서 벗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존엄사 인정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거나,비록 확률은 극히 낮지만 수개월 또는 수년 후 회생할 수 있는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를 뇌사상태로 만드는 의학적 착오도 초래될 수 있을 것으로 우려된다.

향후 존엄사를 실정법에 명시하는 입법 과정에서 적잖은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