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전국적으로 금모으기 운동이 일어났을 때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금으로 만든 십자가를 운동본부 측에 전달했다. 추기경에 취임할 때 받은 것이었다. "매우 소중한 것인데 괜찮겠냐"는 질문에 추기경은 "예수님도 몸을 버리셨다"고 답했다. (송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

김 추기경과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큰 어른'이면서도 소박한 삶을 몸소 실천한 인물로 기억한다. 특히 가식이 없고 인간적인 면이 짙게 배어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은 1980년대 초 경북 고령의 사슴목장으로 김추기경과 함께 소풍을 간 적이 있었다. 사제서품을 받아 처음 부임한 성당 사람들과 양푼에 비빔밥을 만들어 먹으며 놀던 자리에서 추기경은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사실 평생소원은 아들,딸 낳고 필부로 사는 것이다. 어쩌다 추기경이 돼서 이리저리 끌려다닌다"고 말했다. 평소 소원에 대해서도 "은퇴하고 운전을 배워서 가보지 못한 이 나라 강산을 마음껏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운전을 한두차례 시도했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고 선종했다. 또 언제가 김 추기경이 심산상(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을 연구하는 심상사상연구회에서 제정한 상)을 받고 나서 심산 선생의 묘소에 가서 큰 절을 했다. 유학자인 심산 선생에게 그럴 수 있느냐는 말들이 나오자 추기경은 "심산 선생은 민족의 지도자인데 내가 절을 한다해서 잘못된 게 뭐냐"고 반문했다고 김 전 비서관은 회고했다.

박형주 목사는 유신 때 가톨릭에 주교회의가 있다고 해 반대성명을 내달라고 부탁했을 때의 일화를 들려줬다. 회의 자리까지 가서 기다렸는데 김 추기경이 나오더니 "미안하네. (권유를) 해봤는데 잘 안돼"라고 했다. 그래도 사회선교협의회를 만들어 노동이나 빈민운동에 힘을 합쳐서 하자고 제안했고 여러 신부들이 동참했다. 추기경 같은 어른이 뒤에서 밀어준 덕에 암울한 시기에 그렇게 버텨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전태일 열사 어머니인 이소선씨는 1971년 평화시장에서 13~15세 여성근로자들이 일하며 고통받는 것을 보고 위안잔치를 하려는데 아무도 장소를 빌려주는 이가 없을 때 김 추기경의 도움을 받았다. 추기경께 사정을 얘기하니까 "아무 곳도 없으면 명동성당 문화관을 빌려줄 테니 해보겠느냐"며 "음식은 우리가 준비할 테니 몸만 오라"고 말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