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없는 경기침체 영향으로 유럽연합(EU)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단일시장' 체제가 위기를 맞고 있다. EU는 1958년 1월 유럽경제공동체(EEC) 조약이 발효되면서부터 상품과 노동력,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단일시장 체제를 지향해왔다.

그런데 각국에서 나부터 살기가 급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자국 우선주의'가 고개를 들자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영국 정유시설과 발전소 근로자들은 지난 주말부터 일자리가 외국인 근로자에게 돌아가는 데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영국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해외 기업의 영국기업 소유나 외국인 근로자의 취업 등에 관대한 편이었다. 그동안 실업률이 낮고 생활 수준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융위기의 한파가 몰아닥친 후 상황은 바뀌었다.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출신 근로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며 이들의 고용에 반대하는 시위가 연일 벌어지고 있다. 최근 시위는 영국 동부의 린지정유사가 정유시설 건설계약을 이탈리아 회사와 맺자 영국 근로자들이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선데서 촉발됐다. 린지 정유의 노동조합원 빌리 본즈는 "영국 기업들은 영국 근로자들을 고용하려 하지 않는다"며 "이건 외국인 혐오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기회를 달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시위에 대해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을 지낸 피터 만델슨 영국 기업 · 규제개혁 장관은 "영국 기업이 대륙에서 사업할 수 있듯이 대륙 기업들도 영국에서 사업할 수 있다"라며 "보호주의는 일시적 경기후퇴가 아닌 불황을 일으키는 큰 실책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럽 국가들의 '일자리 장벽쌓기'는 이미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스페인의 경우 지난해 10월 일자리가 없는 이민자가 3년 동안 돌아오지 않겠다는 조건을 수락하면 4만달러의 실업수당을 지급하는 '자발적 귀향'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스페인에선 지난해 12월 실업률이 8년 만의 최고치인 13.9%까지 폭등하자 일자리 대책을 요구하는 근로자들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경제위기로 인한 EU 국가 간 불협화음은 지난해 하반기 각국이 금융산업 구제방안을 마련할 때도 노출됐다. 자국 은행과 보험사 살리기에 급급한 나머지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이다. 아일랜드는 6개 자국 은행의 예금자에게 무제한으로 예금지급을 보장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EU집행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당시 예금의 일정액만 지급보장했던 영국은 자국의 예금이 아일랜드로 빠져나간다며 강력 반발했었다. 또 2000억유로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마련할 때는 역내 최대 경제 강국인 독일이 부가가치세 세율인하 등에 반대했다.

박성완 기자 ps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