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범의 유럽문화기행] (4) 베르사유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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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왕 루이 14세의 삶을 연기하는 웅장한 무대
그 시절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엄습하던 그 공포의 소리를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비행기 편대의 굉음을 방불케 하는 소리였다. 서둘러 방공호라도 찾아야 할 것 같은 긴박감 넘치는 소리.그 소리는 학살의 굉음이었다. 그 소리를 처음 들은 건 내가 '라 데팡스'(파리 서쪽의 신도시)로 이사 온 다음 날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공포에 질린 채 황급히 창문을 열었다. 아,그 때의 충격이란.아파트 앞에 조성된 산책로에서 막 10여 명의 정원사들이 가지 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시퍼렇게 날이 선 전기톱으로 나뭇가지를 무자비하게 잘라 내고 있었다. 일정한 높이 위로 삐죽 나오거나 옆으로 튀어나온 가지는 여지없이 톱날 세례에 스러졌다.
가지 치기한 날 아파트 주변엔 하루 종일 나무가 흘린 수액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것은 한국의 숲 속을 거닐 때 나무들이 풍기던 그 향내가 아니라 팔 잘리고 목 잘린 나무들이 풍기는 피비린내였다. 라 데팡스에 살면서 내내 나의 눈을 거슬리게 한 것은 기하학적인 형태로 가지가 잘린 나무들의 섬뜩한 모습이었다. 그 나무들 사이엔 군데군데 벤치가 있었지만 나는 애써 그곳에 앉는 일을 피했다. 팔 잘린 나무들 틈에서 나는 감히 휴식을 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곳에 앉아 있으면 무자비한 프랑스 정원사들의 얼굴이 떠오를 뿐이었다. 더욱이 으슥한 밤 달빛에 비친 나무들의 차가운 실루엣은 나의 공포심을 자극하기까지 했다.
이후 내 머리 속엔 늘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 따라다녔다. 왜 프랑스인들은 도처에 이런 차가운 정원을 만든 것일까? 그들은 과연 전기톱으로 나뭇가지를 마구 자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그리고 가지 잘린 나무들 틈 속에서 그들은 정말 편안함을 느끼는 걸까?
그 답을 구하던 중 나는 우연히 프랑스 정부에서 구축한 인터넷 홈페이지를 알게 되었다. 앙드레 르 노트르(1613~1700)라는 루이14세 시대 정원 건축가의 업적을 기리는 사이트였다. 거기에서 나는 비로소 17세기에 형성된 차가운 형식주의 정원(바로크 정원으로도 불린다)의 등장 배경과 확산 과정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전형은 바로 루이14세가 거처하던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대대로 왕실 수석 정원사를 지낸 집안에서 태어난 르 노트르는 프랑스 '형식주의 정원(formal garden)'의 뼈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그는 의심 많았던 루이14세가 흉금을 터놓고 대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가 르 노트르를 편하게 대한 것은 이 작자의 성품이 워낙 둥글둥글한 데도 있었지만 사실은 이 친구와 친해 놔야만 자신의 야심 찬 계획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거처하는 왕궁의 정원에 절대주의 이념을 시각적으로 구현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어수룩해 보이는 정원사가 사실은 굉장히 샤프한 안목의 소유자이며 탁월한 수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그는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르 노트르는 루이14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루이14세가 베르사유 정원을 만들게 된 계기는 재상 푸케가 자신의 저택 '보 르 비콩트'에서 왕을 위해 베푼 연회에 참석하고 나서였다. 왕은 신하인 푸케의 정원이 자신의 정원보다도 화려한 데 분개하여 푸케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종신형에 처한다. 루브르 궁으로 돌아온 루이14세는 즉시 르 노트르에게 명하여 왕실의 사냥용 별궁이었던 베르사유에 '보 르 비콩트'보다도 더 거대하고 화려한 정원을 만들게 한다.
그는 르 노트르에게 태양신 아폴론의 화신인 자신의 존재를 이곳에 상징적으로 구현하도록 주문했다. 왕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르 노트르는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그것은 시각적 광활함을 구현하고 체계적 설계 원칙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라토나 분수 뒤의 평평한 언덕('테라스'라고 한다)에 선 방문객은 누구나 눈앞에 전개되는 웅장하면서도 탁 트인 광경에 가슴이 확 뚫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광활한 공간 설정은 태양왕이 통치하는 영역이 무한대임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분수 앞의 500m에 달하는 거대한 잔디밭과 이어지는 아폴론의 분수,그리고 그 뒤의 십자형 대운하를 합쳐 눈앞에 전개된 광경은 모두 3㎞에 달한다. 그러나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공간의 깊이는 1㎞에 불과하기 때문에 3㎞를 1㎞ 안에 있는 것처럼 눈속임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뒤로 갈수록 실제보다 크게 보이도록 왜곡이 필요했다. 이른바 역(逆)원근법적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다. 라토나 분수 앞의 잔디밭인 '왕의 길'과 그 뒤의 대운하는 우리 눈에 거의 같은 크기로 보이지만 실제론 대운하가 수십 배나 넓다(사진 참조).참으로 기막힌 설정이 아닌가? 여기에 '공간의 마술사' 르 노트르의 위대성이 있다.
베르사유는 곧 루이14세가 중심이 되는 세계의 상징적 축소판이다.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의 배치도를 보면 태양왕의 거처인 궁전을 중심으로 마치 태양빛이 방사상으로 퍼져나가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사각형의 잔디밭을 중심 구조로 하고 원형,타원형 화단과 호수를 덧붙여 변화를 주는 모습이다. 차가운 기하학적 형태의 강조는 절대 군주인 루이14세를 중심으로 온 세상이 일사불란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담은 것이다. 기하학적 형태를 드러내기 위해 나무들은 팔이 잘리고 목이 잘린 채 본래의 자연스러운 윤곽을 잃었다. 차가운 실루엣의 '정치적 풍경'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베르사유는 태양왕 아폴론의 삶을 연기하는 거대한 무대가 되었다. 이곳을 방문한 이들은 이 장엄한 무대 위에서 절대 군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르 노트르 정원의 파괴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유럽의 절대 군주들은 저마다 베르사유를 모방,형식주의 정원을 만들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형식주의 정원은 대혁명과 함께 퇴조의 운명을 맞는다. 왕의 존재를 부정한 혁명의 시대에 절대 왕정의 유산은 그 존립 근거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 빈 자리를 영국에서 들어온 '풍경식 정원(landscape garden)'이 메웠다. 풍경식 정원은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모델로 하여 조성한 정원을 말한다.
프랑스에 형식주의 정원이 재등장하게 되는 것은 19세기 말 유럽 각국에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과거의 영광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였다. 이때 르 노트르의 명예도 회복되었다. 결국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프랑스 형식주의 정원의 존재는 근세 민족주의의 결과물인 셈이며 따라서 그것이 반드시 프랑스인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에게 있어 이 차가운 정원은 루이14세 시대 프랑스의 영광을 상징하는 민족적 자부심의 원천으로서 후대에 길이 보존해야 할 문화적 자산인 것이다. 앞으로도 프랑스 정원사들의 무자비한 톱질은 계속될 것 같다.
정석범 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