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WTO)가 각국의 잇따른 구제금융 조치들이 불공정 교역을 초래해 무역분쟁을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은행이나 자동차 산업에 대한 잇단 구제조치들이 보조금 지급 등을 금지한 WTO 규정을 위반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다.

◆"보조금 형태 구제금융이 경쟁왜곡"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파스칼 라미 WTO 사무총장은 27일 153개 회원국들에 배포한 보고서에서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각국의 구제금융 조치들은 세계무역에 관한 WTO 규정을 준수하거나,외국 기업들을 차별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행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라미 사무총장은 "그동안 발표된 구제금융 조치들의 상당수는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나지 않아 세계 무역에 어떤 영향을 줄지 속단하기는 힘들지만 일부 국가 지원이나 보조금 형태의 경우 다른 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금융회사 간 경쟁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대형 은행들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부실채권 처분을 지원하는 미국과 유럽의 조치들이 자국 은행들에만 혜택을 줄 경우 WTO 제소를 야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로이터통신은 이와 관련해 통상전문 법률가들은 △미국 정부의 제너럴모터스(GM)와 크라이슬러에 대한 자금지원 △스웨덴의 사브와 볼보 지원 △캐나다 독일 프랑스 호주 아르헨티나 한국 중국 기타 다른 국가들의 자동차산업 지원 패키지도 모두 WTO 제소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고 전했다.

라미 사무총장은 또 "지난해 9월 금융위기가 본격화된 이후 몇몇 국가들이 새로운 무역규제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그는 이 같은 무역규제 조치 사례로 △인도의 철강 수입품에 대한 관세 인상 △에콰도르의 940개 품목에 대한 관세 인상 △인도네시아의 수입 항구 및 공항수 제한 조치 등을 들었다. 라미 사무총장은 "WTO가 다자간무역 원칙을 강화해 늘어가는 무역규제를 줄이는 것이 시급하다"며 "이를 위해 결렬된 도하라운드 협상을 시급히 재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끊이지 않는 각국의 산업 지원

WTO의 이 같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각국에선 자국 내 산업을 살리기 위한 각종 지원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피터 만델슨 영국 산업장관은 이날 의회에서 자동차 산업에 23억파운드(33억달러)를 지원키로 했다고 밝혔다. 13억파운드는 유럽투자은행에서,나머지 10억파운드는 다른 금융사들로부터 투자자금을 유치할 수 있도록 정부가 보증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 자금은 △저탄소 차량 개발에 대한 투자 △자동차업계 근로자들에 대한 교육훈련 △자동차 부품업체들에 대한 지원 등에 사용된다. 만델슨 장관은 "정부의 지원책은 구제금융이 아니라 미래 저탄소 경제를 위한 산업재편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영국 자동차산업은 글로벌 경기침체의 여파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영국 자동차제조딜러협회에 따르면 영국에서 생산된 자동차는 지난해 12월 전년 동월 대비 47.5%나 감소했다. 만델슨 장관은 "자동차 산업은 영국 제조업의 핵심"이라며 "생산능력과 기술의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막기 위해 정부가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유럽자동차공업협회(ACEA)는 이날 역내 자동차 판매가 올해 15%가량 줄어들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유럽 각국 정부들도 추가 구제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기업과 노조 관계자를 만나 자동차산업 지원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현재 낡은 차를 친환경적인 새차로 바꿀 때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2억6000만유로(3억4500만달러)~2억9000만유로(3억8500만달러)의 지원책을 검토 중이다.

독일 정부도 이날 글로벌 경기침체로 타격을 입은 항공기업체 에어버스 지원을 위해 에어버스 구매 고객(항공사)들에 대한 대출보증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앞서 프랑스도 에어버스 구매기업에 대출보증 방식으로 최대 50억유로를 지원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박성완 기자 ps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