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십국의 혼란 중에 건국한 중국 송(宋)은 창업자 조광윤(趙匡胤)조차 앞선 단명 왕조들의 전철을 밟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중국 역사상 3대 부지런한 황제로 꼽는 태종이 불철주야 애쓴 덕에 왕조는 장수의 기틀을 잡았다. 그런 송도 창업 100년을 넘기면서 체제에 무리가 왔다.

20세 청년 황제 신종(神宗)의 등극과 함께 개혁이 발동됐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이다. 그는 과거 4등 합격으로 엘리트 관료의 길이 열려 있었지만, 20여년간 자원해서 지방관을 전전했다. 그의 개혁입법이 실질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풍부한 현장경험 덕분이었다.

그러나 신법이 구체화되면서 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개혁특위에서 함께 일했던 동지들이 사표를 내고, 신종에게 그를 천거했던 은인마저도 등을 돌렸다. 구양수와 사마광 같은 신법반대파(구법당)는 그의 해임을 집요하게 주장했다. 구법당은 균수법 같은 경제 신법이 나라가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것이라고 문제삼았지만, 실상은 자신들에게 떨어질 예외 없는 과세가 문제였다.

구법당은 '왕안석 낙마'에선 당론이 일치했다. 비가 오지 않자 신법 때문이라고 몰았다. '기우제 필요 없다. 왕안석을 해임하고도 열흘 안에 비가 안 오면 내가 사형을 받겠다'고 호언하는 관료까지 있었다. 왕안석은 오불관언이었다. "천재지변은 두려워할 것이 못 되고, 선대의 법은 본받을 바 없으며, 비난은 개의치 않는다(天變不足畏 祖宗不足法 人言不足恤)"고 맞섰다.

신종이 38세에 조사(早死)하면서 문제가 꼬였다. 어린 철종의 수렴청정에 나선 태후(신종의 어머니)가 구법당 영수 사마광을 재상으로 앉혀 신법철폐정부를 구성했다. 정책쿠데타에 저항하는 신법당을 내몰고, 1년 안에 신법을 모조리 폐지했다. 왕안석은 죽는 자리에서 대표 신법인 모역법 폐지 소식을 듣고 "그것마저 없애다니…"라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사마광도 과로한 탓인지 다섯 달 뒤 세상을 떴다.

송의 국운은 절친한 친구이자 적이었던 두 정신적 지주가 죽으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후계자들은 선배의 비전과 기강, 포용력을 배우지 못했다. 왕조를 중간에 한 번 망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 당쟁이 시작됐다.

휘종이 즉위하자 신법당 재상 채경은 15년 전 신법 폐기를 주도했던 '간당(奸黨)' 309명의 이름을 새긴 원우당적비(元祐黨籍碑)를 전국에 세웠다. 그러나 영원하리라 믿었던 비석은 3년이 못 가 철거되고 다시 구법당 천하가 됐다. 나라가 한 번 망한 뒤 재건한 남송 내내 신법당은 비난받았고, 남송이 망한 뒤 완성된 송사(宋史)는 그들의 일을 간신전(奸臣傳)에 기록했다.

관료의 당쟁이 송의 망국을 재촉했지만 초창기 관료, 즉 사대부의 정신세계는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연다(爲萬世開太平)' '세상이 걱정하기 전에 먼저 걱정하고 세상이 다 즐거움을 누린 다음에야 즐거움을 누린다(先憂後樂)'는 두마디 말로 집약될 만큼 치열하고 강건했다.

요즘 '개혁추진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고급 공무원들의 단체사표를 받는다고 한다. 주위가 자기사람 일색이어야 일이 된다고 생각하는 편협한 보편주의도 문제지만,'영혼 없는 공무원' 정도라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표를 낸다 한들 억울할 게 없을 것이다.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