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종 <서울대 교수ㆍ정치학>

예산안 처리 매년 진흙탕 싸움, 민생공부위해 노숙자 체험이라도

매년 이맘 때면 우리국회가 겪는 홍역과 같은 것이 있다. 새해 예산안 처리를 둘러싼 여야 힘겨루기에서 비롯된 진흙탕 싸움이다. 진흙탕 싸움의 빌미가 되는 사연은 그때그때 다르나 "염불보다 잿밥"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이유같지 않은 이유들이 예산안 처리 발목을 잡는 것은 똑같다. 한때는 그래도 그런 여야의 다툼이 '성장통'과 같은 것이려니 하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정당과 국회가 성숙해지면 저급한 행태들이 사라지려니 하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만성형 고질병'이 된 것 같다는 절망감을 떨치기 어렵다.

금년에도 이 속물스러운 모습은 예외가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여야가 새해 예산안을 12일 처리하기로 합의했다지만,그동안의 행태로 미뤄볼 때 믿음이 가지 않는다. 합의에 대한 뒷맛도 개운치 않다. 헌법이 정한 예산 처리시한인 2일을 훌쩍 넘겨버렸기 때문이다. 172석의 의석을 가진 여당이 공룡의 무기력함을 방불케 할 만큼 그동안 보여준 정치력이라는 것도 한심스럽기 짝이 없지만,민주당의 발목잡기 전략도 가관이다. 예산심의가 중요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상임위별 소위원회 구성을 거부하기도 했다. 국회예결계수조정소위 회의장 내에서는 때 아닌 국회의원들의 피켓시위가 벌어졌다. 시민단체와는 질적으로 다른,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이 피켓을 들고 회의장에 앉아 있는 모습은 앨리스가 겪은 '이상한 나라'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 '이상한 나라'에서는 모든 게 거꾸로 되어 있다.

하기야 우리주변을 보면 거꾸로 된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길을 가다가 산과 강이 멋지게 어우러진 풍경을 보면 "한 폭의 그림같다"고 탄성을 지른다. 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명을 받아 그런 말을 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나,사물의 이치를 따지자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림이란 실제의 사물을 놓고 그린 결과물에 불과한데,실제의 사물을 보면서 그림같다고 하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뒤바뀜 현상도 없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정치의 현 주소가 바로 이 도치법을 영락없이 빼닮았다는 데 있다. 대의민주주의를 책임지고 이끌어가야 할 국회의원들이 일반 시민들이 주도하는 참여민주주의나 광장 민주주의의 주연 노릇을 하고자 한다면,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는가. 정녕 '이상한 나라'의 국회가 되려고 하는 것인가.

왜 우리 국회는 국민들이 절실히 필요로 할 때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가. 왜 국회의원들은 대한민국의 선량(選良)으로 살지 않고 '화성에서 온 남자'나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살려고 하는가. 당장 거리에 나가보라.10여년 전 외환위기 때보다 경제사정이 어려워졌다고 난리다. 음식점도 반으로,학원수강생도 반으로 줄었다. 모두가 최악의 상황을 각오한 비장한 모습이다. 그런데 국회의원들만 '독불장군'이 되어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신선노름에 몰두하고 있으니,어찌 이것이 직무유기가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우리 국회의원들에게는 혹독한 현장체험이 절실한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심기일전을 위해 일상을 떠나 현장체험에 나서는 사례도 우리 주변에 흔하다. 이왕 생산성없는 국회이니 며칠 쉰다고 큰일이 나겠는가.

의원들도 지금부터 국회를 쉬고 길거리의 노점상이나 노숙자로 한 3~4일 현장체험을 하는 것이 어떤가. 민생에 무신경한,"하늘 아래 둘도 없는 국회"여! 이런 체험이라도 해봐야 비로소 이 엄동설한에 공포와 절박함 및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는 '공감능력'과 '역지사지' 능력이 생길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