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불안과 경기 침체의 골이 점점 깊어지는 가운데 한국은행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선제적이고 과감한 조치가 필요한 상황에서 한은이 너무 소극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대통령까지 나서 "한국은행도 이제 통상적으로 해 오던 것으로는 안 되겠다고 스스로 판단할 것"이라며 공개적으로 '액션'을 촉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시장,"한은이 뒷북만 친다"

정부와 시장의 한은에 대한 비판은 한마디로 '뒷북만 친다'는 것이다. 정부가 추진 중인 10조원 규모의 채권시장안정펀드가 대표적이다. 시장에선 당초 한은이 최소 5조원 이상의 자금을 지원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한은은 '최대 5조원 지원' 방안을 내놨다. 채권시장에선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나온다. 신동준 현대증권 채권분석팀장은 "한은의 자금 지원 의지나 규모가 여전히 소극적"이라고 지적했다.

한은이 지난 10월 환매조건부(RP) 방식으로 은행채를 매입하기로 한 것도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한은 작품'이라기보다 금융위원회와 금융회사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한은이 1일 운전자금용 외화대출의 상환 기한을 폐지하고 중소기업에 대한 수출입금융 지원 방식을 개선하겠다고 밝힌 것도 마찬가지다. 환율 급등으로 외화대출자들이 '원리금 상환이 힘들다'고 아우성을 치고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한은에서 수출입금융 지원을 받기 힘들다'는 은행들의 하소연이 있고 나서야 뒤늦게 보완책이 나왔다는 얘기다. 서철수 대우증권 연구위원은 "한은이 시중에 돈을 푸는 데 너무 인색하다"며 "결국에는 피해갈 수 없는데 애써 그 길을 가지 않으려 한다"고 꼬집었다.

◆한은,"돈 관리는 신중히"

한은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한은도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필요한 대응을 하고 있는데 시장에선 이를 '뒷북 대응'으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이성태 총재는 10월27일 긴급 금융통화위원회 이후 기자회견에서 "돈을 관리하는 사람과 돈을 쓰는 사람은 처지가 다르다"고 말했다. 시장 참가자들은 한은에 과감하게 돈을 풀라고 하지만 한은은 이래저래 신경 쓸 것이 많다는 것이다.

한은 관계자는 "위기 상황이 악화되면 강도 높은 대책을 내놓는 것이 맞지만 지금이 특정한 대책을 써야 할 때인지는 곰곰히 따져봐야 한다"며 "시장이 요구하는대로만 움직이면 장기적으로 한국 경제에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통화정책은 물가나 환율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해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은 선진국과 달리 중앙은행의 역사가 짧아 통화정책의 효과를 검증하기 쉽지 않은 점도 한은이 보수적 행보를 보이는 이유다.

사안별로는 정부의 '독단'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가령 채권안정펀드의 경우 당초 금융위 발표 때는 한은의 자금지원 계획이 없었는데 나중에 채권시장이 불안해지자 한은에 손을 벌리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에선 기획재정부나 금융위원회 청와대 등이 위기 돌파를 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모면하기 위해 목소리가 낮은 한은에 책임을 돌리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은,환골탈태가 필요하다

하지만 한은을 보는 시각은 여전히 곱지 않다. 정부 관계자는 "지금처럼 한은의 힘이 필요한 때가 언제 또 있겠느냐"며 "잘만 하면 스스로 위상을 높일 수 있는데 한은이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은이 조직 목표인 물가 안정만 지나치게 집착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평소에는 물가 안정이 주목적이지만 위기 국면에선 한은도 달라져야 한다"며 "전 세계 중앙은행들도 경제 위기를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승호/주용석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