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간부 딸 살해 혐의로 무기형..재심서 누명 벗어
재심 재판부 "적법절차에 대한 성찰과 고민 부족했다"

지난 1972년 춘천에서 경찰 간부의 딸을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5년 간 복역했던 살인범이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아내 36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춘천지법 제2형사부(재판장 정성태 부장판사)는 28일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뒤 목 졸라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15년 간 복역했던 정원섭(74.당시 38세)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정 씨로서는 당시 사건 이후 살인범으로 낙인찍힌 지 36년 만이자,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1999년 서울고법에 첫 재심을 제기한 지 10년 만의 명예회복인 셈이다.

특히 그동안 간첩 조작 등 시국관련 사건 피고인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 선고는 수차례 있었으나, 이번처럼 일반 형사 사건의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것은 사법 사상 극히 이례적이다.

재판부는 "당시 수사 경찰관들이 정 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정도의 폭행·협박 내지 가혹행위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며 "수사기관이 제출한 증거는 적법 절차에 반하는 중대한 하자가 있어 증거 능력이 없거나 절차적 하자 등의 문제로 증명력이 부족한 만큼 정 씨에 대한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또 "신의 눈을 갖지 못한 재판부로서 감히 이 사건의 진실에 도달하였다고 자신할 수 없지만 다만 분명한 것은 검찰이 제출한 이번 사건의 증거들은 증거로 사용될 수 없거나 믿을 수 없어서 그것 만으로는 피고인의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이어 "긴 시간 동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법원의 문을 두드린 피고인 정 씨에게 경의를 표한다"며 "수사 과정에서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와 적법절차를 보장받지 못한 채 고통을 겪었던 피고인이 마지막 희망으로 기댔던 법원마저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부족했고, 그 결과 피고인의 호소를 충분히 경청할 수 없었다는 점에 대해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다"라고 언급했다.

'춘천 파출소장 딸 강간살인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1972년 9월 27일 춘천시 우두동 논둑에서 초등학생(당시 9세.여)을 살해한 혐의로 붙잡힌 정 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5년 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끝에 1987년 모범수로 가석방됐다.

이후 정 씨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1999년 11월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2001년 10월 기각됐다.

결국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이 사건을 '춘천 강간살인 조작의혹 사건'으로 규정하고 국가에 재심 등 후속 조치를 권고했다.

이에 따라 정 씨는 1심 법원인 춘천지법에 두 번째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당시 사건 기록과 증인 등에 대한 재조사를 거쳐 재심 개시를 결정했었다.

(춘천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jle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