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 세종국가경영硏연구실장>

고려 때 성공외교는 신랄한 토론의 결과

G20 등서 국익 관철할 외교관 나왔으면

《고려사》를 읽으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은 놀랄 만큼 활발한 어전회의 전통이다. 고려 현종 때(1031년) 60여 명의 신하들은 거란과의 외교문제를 놓고 대토론을 벌였다. 예종 때(1109년)도 9성(城)의 반환 문제로 3품 이상의 관리들이 모여 논쟁을 했다. 국정 사안에 대해 왕과 신하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사례는 이외에도 많다. 993년 10월 거란의 침입 때도 비슷했다. 국왕 성종은 긴급 조치를 취한 후 곧바로 "여러 신하들을 모아 그 대응책을 의논(會群臣議之)"하게 했다. 평양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이른바 '항복론'과 '할지(割地)론'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고,서희의 신중한 '계책'도 제시됐다.

그런데 사료의 그 대목을 유심히 읽어보면,서희의 계책이 '항복'을 주장하는 "어떤 사람의 말(或言)"과 '할지'를 주장하는 또 다른 의견이 충돌하는 과정을 거쳐서 나왔음을 알게 된다. 애초부터 서희의 '계책'이 마련돼 있었던 것이 아니라,일련의 토론을 통해 비로소 그러한 의견이 나온 것이다.

성종의 유연한 태도 역시 중요했다. 왕은 한때 '할지론'을 따라 평양의 곡식을 버리려고 했으나,"식량은 백성의 목숨(食者民之命)"이라는 서희의 말을 듣고 그 일을 즉시 중지시켰다. 성급히 항복하지 말고 적장 소손녕의 속마음을 떠보는 한편,팔관회 등을 부활해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는 이지백의 제안도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한마디로 '평양대토론'에서 성종은 좋은 의견과 제안을 가려서 채택했을 뿐만 아니라,그 적임자에게 일을 위임하는 등 회의의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하지만 993년 국가대위기를 구해낸 주역은 역시 서희였다. 그는 초기에 대동강에 쌀을 버리려는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았으며,"적의 약점을 알고 행동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며 홀로 적진으로 나아갔다. 안융진(평안도 안주시)에서 이뤄진 담판에서 주목되는 서희의 협상력은 크게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상대방의 발언 속에서 '핵심조건'(고려ㆍ거란의 국교수립)과 '부가조건'(고구려의 영토 할양)을 구분해 내는 경청과 분별의 힘이다. 그는 적장 소손녕이 한 말(聲言)과 글(移書) 중에서 후자인 글에 비중을 두어 핵심조건을 수락하되,부가조건은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밀어붙여 상대방의 양보를 얻어냈다.

그는 또한 질서정연한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했다. 그는 '군신(君臣)의 예법'을 주장하는 소손녕에게 '양국 대신(大臣)간의 예'를 설파했다. 또한 고구려 땅이 거란의 관할 하에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국명(고려)과 도읍지(평양)를 들어 논파했다. 제3자가 보아도 설득력 있는 논리와 논거로 상대방을 설복시킨 것이다.

그런데 서희 외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그의 인격적인 매력이었다. 송태조는 일찍이 그를 보고 "몸가짐과 행동거지가 반듯하다"며 벼슬을 내렸다. 안융진 담판에서 소손녕은 처음에 동등한 예법을 주장하며 숙소로 돌아가 누워버린 그를 보고 '기이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풍부한 학식과 당당한 태도,탁월한 협상력을 겪으며 점차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8일간의 협상 종료 후 위로연에 초대받은 서희가 "지금 온 나라 사람들이 전쟁의 고통 중에 있는데,나 혼자 즐길 수는 없다"며 거절하다가,'굳이 청하자 흔쾌히 즐기는' 것을 보고 그는 외교관의 참모습을 발견했다.

내년 4월 예정된 G20 회의 의장단으로서의 준비,다시 대두되는 한ㆍ미FTA 재협상,그리고 교착된 남북문제를 풀 수 있는 '대한민국의 서희'가 필요하다면,우리는 먼저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간명직절(簡明直截)하게 말하는 토론문화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