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신용위기에 대한 우려가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모르면서 이번에는 채권시장이 사실상 마비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회사채 시장에선 매수세가 얼어붙으면서 거래가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주요 매수 세력이었던 농협 국민연금 지식경제부(옛 정보통신부) 등이 관망세를 보이는 데다 투신 증권 등의 기관이 유동성 확보에 매달린 탓이다. 기업 신용에 대한 불신에다 일부 증권사들의 단기 유동성 우려마저 더해지며 작은 매물에도 채권값(금리)이 급락(급등)하는 등 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28일 증권업협회에 따르면 9월 들어 지난 주말까지 장외채권시장의 거래량은 218조원으로 올 1월의 281조원에 비해 22.4% 줄어들었다. 국고채 거래량은 112조원에서 96조원으로 14.2% 감소하는 데 그쳤지만 회사채의 경우 5조2000억원에서 3조3700억원 규모로 36.5%나 급감했다. 회사채와 함께 대표적인 '크레디트물(비정부 채권)'로 꼽히는 은행채 거래량도 44조원에서 38조원으로 13%가량 줄어들었다.

길기모 굿모닝신한증권 연구위원은 "리먼 사태 이후 주요 기업들과 제2금융권의 유동성 우려가 확대되면서 매수세가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특히 국고채를 제외한 크레디트물에 대한 투자심리 악화로 '사자'가 사라지다보니 소량의 매물만 나와도 금리가 급등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빌려오는 데 애를 먹고 있는 증권사들이 보유채권을 매도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 주말에는 투신(자산운용사)들이 1000억~2000억원 규모의 연기금 채권형펀드 환매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채를 대거 팔아치우면서 막판 시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매수세가 없는 상황에서 매물이 쏟아지면서 1년 만기 산금채 금리는 올 들어 최고 수준인 연7.01%로 뛰어올랐다.

기업들의 '신용 리스크'에 대한 프리미엄이 지나치게 높아졌다는 점도 시장을 짓누르고 있는 요인이다. 채권시장에서는 지난 8월 이후 제기된 일부 대기업들의 유동성 위기설에 기업들의 신용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고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언제 어디서 어떤 이슈가 터져나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져 있어 회사채의 경우 거의 거래가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지난주 일부 자산운용사에서 포트폴리오 조정을 위해 리먼 관련 손실 가능성이 제기된 K사와 D사 등의 회사채를 헐값에 손절매하면서 금리가 급등한 것도 불안심리를 증폭시켰다는 지적이다.

국고채 3년물 금리는 지난달 말의 연 5.77%에서 지난 26일엔 6.01%로 오르고,회사채 3년물(무보증 AA-) 유통수익률은 같은 기간 7.34%에서 7.85%로 치솟았다. 특히 회사채값이 급락하면서 회사채와 국고채 3년물간 금리차를 뜻하는 신용스프레드는 지난 26일엔 1.84%포인트까지 치솟아 현대그룹 계열사들의 유동성 문제가 부각됐던 2001년 1월17일(1.94%포인트)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시장 전문가들은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될 경우 가능성에만 머물던 신용위기가 현실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박석현 HI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신용경색 리스크가 확산되고 그에 따른 자금 운용의 보수화로 금융권 손실이 확대될 경우 국내 금융시장과 경기는 악순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윤여삼 대우증권 연구원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먼저 유동성을 확보하려는 심리전이 지속되면서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제1금융권의 자금이 제2금융권으로 유입되지 못하고 있다"며 "직접적인 유동성 수혈 등 정부 차원의 대책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강지연 기자 sere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