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냉정하게 품질만 보고 고르기란 쉽지 않다. 가격이 얼마인지,누가 생산했는지 등 여러 선입관이 선택의 순간에 끼어든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와인이 약 350년의 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국내시장에서 홀대받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인종차별,가난,아프리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멍에를 남아공 와인들은 항상 지고 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와인 애호가들에게 남아공 와인처럼 덜 알려진 와인이 때론 보배가 될 수 있다. 엄경자 코엑스 인터컨티넨탈호텔 소믈리에는 "남아공 와인의 단점은 덜 알려졌다는 것뿐"이라며 "오랜 역사에다 국가의 수출 장려 덕분에 최근 10년 새 품질이 월등히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일단 시장을 넓히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수입사들이 초창기에 들여오는 와인은 어느 정도 품질이 보증되는 것이라는 점도 참고할 만하다.

남아공 와이너리들은 스스로를 '중간 대륙'으로 부른다. 프랑스,이탈리아 등 구대륙과 미국,칠레 등 신대륙 와인의 절묘한 조화가 자신들의 장점임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남아공이 처음 와인을 생산한 시기가 1695년으로 미국 등에 비해서는 '고참'이지만,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와인을 선보인 것은 1990년대인 만큼 실질적으로는 '새내기'로 분류된다.

남아공 와인은 칠레 등 옛 유럽 식민지들이 대부분 그렇듯 네덜란드,영국 등 유럽에서 이주해 온 지배자들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한때는 유럽 내 부족한 와인 공급을 채우는 데도 큰 몫을 했다. 번영을 구가하던 남아공 와인산업은 1899년 네덜란드,영국 간 보어전쟁과 1970년대 인종차별 정책이라는 두 가지 큰 장애물을 만나 몰락 직전까지 갔다. 100년에 가까운 침체기를 거친 남아공 와인산업은 1994년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취임,국가가 와인산업을 장려하면서 케이프 와인산지를 중심으로 매년 두 배가량의 급속한 성장을 하고 있다.

1791년 설립돼 2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니더버그'는 남아공 와인의 부활의 정점에 서 있는 와이너리다. 이곳에서 남아공 토착 포도 품종인 피노타쥐로 만든 '와인마스터즈 리저브 피노타쥐'(2만원)는 남아공 와인의 정수를 느끼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는 평을 듣는다. 피노타쥐는 프랑스 부르고뉴가 주산지로 유명한 피노 누아와 생쏘 품종을 결합해 만든 것으로,스파이시(spicy) 혹은 훈연(燻煉)향에 과일향이 잘 어우러진 게 특징이다. 화이트 와인인 '매너 하우스 소비뇽 블랑'(3만원)도 추천할 만하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