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질계이건 비물질계이건 질량불변의 법칙이 지배한다. 옛사람들도 세상을 구성하는 4대 근본물질(물ㆍ불ㆍ흙ㆍ공기)은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기는 하지만,총량은 결국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어릴 때 '해와 달은 차면 기운다(日月盈仄)'를 배우면서 순환과 조화,병존(竝存)의 원리를 일찍부터 체득했던 것이다.

이런 불변의 법칙이 세상 부의 세계에도 적용된다면 결국 부를 둘러싼 문제는 제로섬 게임이다. 한쪽에서 부의 과(過)소비가 가능한 것은 다른 한쪽에 강요된 과(寡)소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종속이론이 주목받았던 것은 '중심부가 주변부의 부를 착취한다'는 고전적 발견이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새로웠던 것은 중심부가 꽂아놓은 빨대효과로 말미암아 주변부에서 '저개발의 개발'이 진행되고 고착되는 구조였다. '못 사는 나라는 왜 못 사는가'를 역사적으로 해명했던 것이다.

세계화의 절정기에서 파이낸셜타임스 칼럼니스트인 저자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답은 세월이 흐른 만큼이나 다르다. 부자나라가 된 조건을 살펴본 결과 그들은 역사적으로 정치 상황과 잘 융합된 시장을 키워왔고,일찍이 다원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인도 같이 못 사는 나라는 설령 원조와 자본을 받아도 잘 사는 나라의 규범과 제도를 따르지 않으면 헛수고이며 경제 발전이 '심지어 후퇴'하기도 한다고 저자는 혹평한다. 가난한 나라는 선진국의 자본과 기술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시스템까지 한 조로 묶어 받아들여야 경제 발전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책의 원저(≪Culture and Prosperity≫)는 전 지구적으로 세계화가 절정을 맞았던 2003년에 출판됐다. 그후 세계화가 한풀 꺾이고 세계 경제가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로 난리 와중인 이 마당에 이 책이 번역 출간된 타이밍은 좀 뜻밖이다. 특히 첨단 금융기법이라는 이름 아래 이번 사태의 주범인 금융파생상품의 이론을 제공해온 시카고학파와 일부 노벨경제학상 학자를 추키는 대목은 그렇다.

우종근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