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계섭 <서울대 교수ㆍ경영학>

건국 6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의 역사는 미국의 컬럼니스트인 마이클 베이런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드 코리아(Hard Korea)와 소프트 코리아(Soft Korea)로 불릴 수 있는 시기들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소프트 코리아는 정치,사회적 권리에 대한 요구와 주장이 분출돼 결실을 맺은 시기다. 하드 코리아는 경제 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놀라운 성과를 이룬 시기다.

60년 동안 소프트코리아의 시기는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1948년에서 1960년까지 계속됐다. 이 기간동안 경제 발전은 뒷전이었다. 그 대신 사회는 토지개혁과 같은 사회적 요구와,권위주의 정권 퇴진과 민주적 절차에 충실한 공정 선거 실시와 같은 정치적 권리에 대한 요구에 휩쓸렸다. 1950년 3·10 토지개혁과 1960년 4·19 혁명을 통해서 이들 요구는 대부분 현실화됐다.

첫 번째 소프트 코리아는 1961년 5·16 군사 혁명과 함께 막을 내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 발전 대신 경제 개발에 전력했다. 지도자의 걸출한 비전과 빈곤을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국민들의 의지와 성실성이 하나가 돼 우리 경제는 세계 최빈국이라는 꼬리표를 떨쳐낼 수 있게 됐다. 제3공화국 기간에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연평균 8.5%의 눈부신 성장을 해 최빈국에서 벗어났다.

1979년 10월26일에 벌어진 전두환 소장의 군사 쿠데타는 하드코리아의 기간을 연장시켰다. 제5공화국은 1970년대 말 저성장,고인플레이션이 합쳐진 스태그플레이션을 잘 극복해냈다. 물가 안정을 이뤘을 뿐 아니라 중화학 및 전자 제품을 수출하는 수출국으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1986년,명목 국민총생산액이 1000억달러를 돌파하자 세계는 우리를 '제2의 일본'이라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하드코리아는 계속되지 못했다. 경제성장과 함께 눌렸던 사회적 요구가 폭발해 소프트 코리아가 재개됐다. 1987년 6월10일,이른바 '6월 항쟁'으로 막을 연 두 번째 소프트 코리아의 기간 동안 우리는 괄목할 만한 정치 발전을 이룩했다. 수없이 많은 요구와 주장이 터져나왔고 이들 중 대다수가 결실을 보았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착했다. 여성의 권리와 노동자들의 권리도 크게 개선됐다. 장애인의 기본권과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도 눈에 띄게 높아졌다. 2007년 12월19일,두 번째 소프트 코리아가 막을 내렸다.

절대 다수의 국민들은 '경제살리기'를 으뜸 공약으로 내세운 이명박 후보에게 투표를 했다.

또 한 번 하드 코리아의 시기가 시작될 수 있는 발판을 놓았다. 그렇지만 과연 하드코리아가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그 어느때보다 포퓰리즘의 유혹이 거세다. 지난 10년간 우리 경제는 세계경제 활황기 동안 국가 경쟁력 신장을 게을리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대통령은 첫번째 하드코리아 기간의 대통령들과는 달리 자의적으로 국정운영을 할 순 없다. 세계 경제 환경은 악화일로에 있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경제 선진국의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소프트 코리아의 유산을 계승하기 위해서다. 경제 성장은 정치,사회적 권리를 보다 알차게 누릴 수 있게 하는 없어서는 안 될 토양이다. 후진국 중에 복지국가가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보다 잘 지키기 위해서도 경제력의 뒷받침이 절실하다. 그러하기에 건국 60주년 기념일은 과거의 성취를 자축하는 날일 수만은 없다. 다시 한 번 하드 코리아를 꽃피우기 위해,대한민국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온 국민이 결의를 다지는 날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