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아 < 한림대 의과대학 교수ㆍ kimha@medimail.co.kr >

연구비 대란이다. 보건복지부나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 수혜 경쟁률이 높아 1년에 10개의 계획서를 내야 한 개 딸까 말까다. 나도 상반기에 낸 4개의 계획서가 모두 떨어져서 당장 내년에는 어떻게 실험실을 꾸려나갈지 고민이다.

과학자들의 연구비 고민은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 평가가 엄격한 미국에서는 연구비가 끊기는 날이면 교수도 짐을 싸고 나가야 하기 때문에 해마다 연구비 신청 기간에는 사람들의 눈에 핏발이 서있고,그런 모습을 보면서 미국 사회가 참으로 무섭고 냉정하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나는 강의를 할 때마다 던지는 질문이 있다. 과학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다섯 번의 실험을 했는데,세 번은 원하는 결과를 얻고 두 번은 얻지 못했다면 이 가설은 입증된 것인가. 물론 실험을 더 해보면 답이 나오지만 현실에서는 한 번의 추가 실험이 적지 않은 연구비 지출을 의미하기 때문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처럼 적은 연구비로 반드시 결과를 내야 하는 시스템은 연구를 위한 연구,최악의 경우에는 황우석 사태와 같은 대규모 데이터 조작 연구를 양산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도 이러한 경직된 연구비 수혜 시스템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고 참신한 발상을 독려하기 위한 새로운 수혜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서 제공하는 글로벌 프로젝트는 단 두 페이지의 선행 연구 결과 없는 연구 계획서를 받고 오로지 아이디어만을 평가해 심사한다. 그 기저에는 아무리 참신하고 좋은 아이디어라도 결과가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고,그럼에도 과학의 발전은 이런 실패 가능성이 높은 발상들에서 이루어졌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연구 주제 선정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질병의 치료와 직결되는 임상 연구에는 연구비 수혜가 거의 없다. 정말 하고 싶고 의미있는 연구는 다른 것인데,연구비 때문에 오늘도 선행 연구를 뒤쫓는 데이터를 내기 위해 무수한 플라스틱 소모품을 쏟아내는 실험실 쓰레기통을 바라보며 내가 정말 인류를 위해 공헌하고 있는 것인지 반문하는 날도 많다.

내가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0년 전만 해도 연구비가 없으면 사재를 털어 실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까. 이제 양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룬 만큼 질적인 성장도 필요할 것 같다.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닌 정말 의미있는 연구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