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50명 출전 올림픽, 올핸 267명 매머드 선수단
엘리트-생활체육 조화된 선진국형으로 발전해야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48년 한국은 런던 올림픽에 최초로 출전했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과 1936년 베를린 대회에도 한국 선수들이 올림픽에 나갔지만 그 때는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한국 이름으로는 이 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한국은 7개 종목에 임원 17명, 선수 50명을 파견해 역도 남자 75㎏급 김성집, 복싱 51㎏급 한수안이 동메달을 따냈다.

임원 122명, 선수 267명을 보내 금메달만 10개 이상을 노리는 이번 베이징올림픽을 떠올려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국내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축구를 보면 60년 전 한국 스포츠 수준이 더 명확히 드러난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은 멕시코를 5-3으로 꺾고 8강에 올라 올림픽 본선 첫 승의 기쁨을 만끽했으나 8강에서 스웨덴에 무려 0-12로 참패를 당하며 세계와 수준차를 절감해야 했다.

메달권 진입을 노리는 지금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던 셈이다.

이후 1972년 뮌헨 올림픽까지 7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하며 꾸준히 발전해온 한국 스포츠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감격의 첫 금메달을 따냈다.

레슬링 양정모가 우승을 차지하며 올림픽 출전 28년 만에 첫 금메달을 목에 건 것이다.

양정모의 금메달은 단순히 금메달 한 개의 가치 이상이었다.

이후 한국이 올림픽에서 10위권 수성을 목표로 내걸며 스포츠 강국을 자처하게 된 출발점이 바로 이 때였다.

또 '스포츠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도 이 즈음에 사회적으로 퍼진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엘리트 스포츠 부흥의 신호탄이 이 때 터진 것일 수도 있다.

이후로 한국 스포츠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굵직한 사건들이 연달아 나오기 때문이다.

1979년부터 1988년 올림픽 유치를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됐고 1981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서울시가 이미 확보한 시설과 앞으로 건설할 계획인 경기장, 대회경비 및 대회운영에 관한 총괄계획 등 150항목에 달하는 답변서를 제출하면서 경쟁 도시였던 일본 나고야와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같은 해 3월 IOC가 현지 조사단을 파견해 서울의 올림픽 개최 능력을 평가했고 한국은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리는 IOC 총회를 3주 정도 앞두고 유치대표단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체육계 인사는 물론 재계, 정부 관계 인사 등 107명으로 구성된 유치대표단은 1981년 9월18일 서울을 떠나 20일에야 바덴바덴에 도착했다.

현지 분위기는 나고야 우세를 점치는 전망이 많았지만 서울올림픽 전시관이 개관된 이후 한국의 놀라운 발전상이 알려지며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결국 9월30일 IOC 총회에서 IOC 위원들의 투표 결과가 발표됐고 결과는 잘 알려진 대로 서울의 52-27 승리였다.

당시 한국 사람들 중에 바덴바덴을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였고 사마란치 위원장의 서울 발표 장면은 애국가 방송 배경 화면의 단골로 쓰였을 정도로 온 나라에 감동의 물결이 휘몰아쳤다.

불과 33년 전 신생국으로 올림픽에 처음 출전했던 한국이 당당히 올림픽 개최국으로서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순간이었다.

다음 해인 1982년에는 한국 땅에 프로스포츠가 꽃을 피운 때로 기록이 된다.

1982년 프로야구가 삼성, 롯데, 해태, OB, 삼미, MBC의 6개 구단으로 첫 시즌을 시작했고 1983년에는 유공, 할렐루야 등 프로팀 2개와 대우, 포항제철, 국민은행 등 3개 실업팀이 참가한 축구 슈퍼리그가 운영됐다.

이 시기에 민속씨름과 겨울철 실내스포츠인 농구 점보시리즈, 배구 백구의 대제전도 시작돼 그야말로 스포츠 중흥의 시대가 도래했다.

반대로 이 때를 비판적인 잣대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민의 관심을 정치 이외의 쪽으로 돌리려는 수단으로 스포츠를 악용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물론 그런 부분도 분명히 있겠지만 그 이후로 정권 교체가 두 번이나 된 지금까지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스포츠로 자리 잡은 것을 보면 국내 프로스포츠의 태동을 그렇게 비판적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2년 사이에 한국에서 연달아 열린 1980년대 중후반은 한국 스포츠의 최절정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1986년 아시안게임의 성공적인 개최는 2년 뒤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예감하게끔 만들었다.

27개국 4천839명이 참가한 서울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금메달을 무려 93개를 따내 종합 우승을 차지한 중국에 금메달 1개 차이로 메달 순위 2위를 차지했다.

경기력 뿐 아니라 비교적 깔끔한 대회 개최를 통해 종합대회를 치를 능력이 있음을 과시했고 특히 1970년 제6회 대회를 유치했다가 반납했던 불명예까지 날렸다는 의미도 있었다.

이 때 자신감이 바탕이 되면서 1988년 서울올림픽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특히 서울올림픽은 무려 12년 만에 치러진 정상적인 올림픽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 컸다.

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미국을 위시한 이른 바 자유진영에서 대거 불참했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에는 공산권 국가들이 이에 반발해 '보복 불참'을 하는 바람에 반쪽 올림픽이 됐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남북이 대치하며 냉전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현장인 한반도에서 열리는 올림픽이 동서 화합의 장이 된 셈이다.

1988년 2월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본격화한 '북방 정책'과 맞물려 당시 동구권 나라들은 한국민들의 따뜻한 성원을 받기도 했다.

실제 남자농구 준결승에서 벌어진 미국과 소련 경기에서 경기장을 찾은 한국 팬들이 대부분 소련을 응원했던 사례는 사회적 이슈까지 됐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비단 체육계에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올림픽을 치러낸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했고 이런 사회적 합의는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발전하는 원동력이 됐다.

이후 다시 한 번 한국 스포츠계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은 역시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 개최다.

1996년 6월1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한국과 일본이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를 공동으로 개최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서울올림픽 때처럼 일본을 제치고 개최권을 따내 주기를 바라는 국민적 열망이 있었지만 한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를 희망해 표 대결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1988년과 마찬가지로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는 적지 않은 의미가 있었다.

월드컵 축구대회 사상 최초로 공동 개최가 이뤄졌고 21세기 첫 월드컵 개막전을 한국에서 열게 된 것이다.

대회는 2002년 5월31일 시작됐으며 한국의 10개 도시, 일본의 10개 도시에서 6월30일까지 계속됐다.

4강에 오른 경기력도 경기력이지만 무엇보다도 맞춰 입기라도 한 듯 경기장과 거리를 붉은 색으로 물들인 한국인들의 단합된 모습이 세계를 감동시켰다.

한국의 거리 응원은 외신에도 여러 차례 소개되며 한국만의 독특한 응원 문화로 인정받았고 이런 모습들은 스포츠를 통한 사회 통합의 좋은 예로 남게 됐다.

다만 그런 면에서 2000년 시드니와 2004년 아테네올림픽 개막식에서 있었던 남북한 동시 입장이 이번 베이징올림픽에서 무산된 점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스포츠를 통한 남북 교류가 꾸준히 진행돼왔던 점을 떠올려보면 이번 올림픽 동시입장 무산의 분위기가 길게 가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정부수립 60년을 맞아 한국은 이제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으로 우뚝 섰음을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올림픽과 월드컵 축구대회 개최, 프로 스포츠의 정착 등의 쉽지 않은 과제들을 착실히 풀어온 한국 체육은 향후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의 적절한 조화 속에 선진국형 스포츠 모델을 구현해 내겠다는 청사진을 갖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김동찬 기자 emailid@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