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을 짓누르고 있는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 속 물가 상승) 악령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유럽중앙은행(ECB) 등 주요국 통화당국의 발목을 꽁꽁 묶어놓고 있다. 침체에 빠져들고 있는 경기를 살리고,커지는 인플레이션 압력도 잡자니 뾰족한 방법이 없어서다. 이에 따라 조만간 예정된 금리회의에서 기준금리가 현재의 수준에서 동결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예상된다.

3일 블룸버그통신과 마켓워치 등에 따르면 대부분의 월가 전문가들은 5일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기준금리가 현재의 연 2.0%로 동결될 것으로 보고 있다. 로이터가 오는 7일 각각 열리는 ECB와 영국중앙은행(BOE)의 금리 결정회의를 앞두고 실시한 조사에서도 대부분의 시장참여자들은 양 중앙은행이 내년 1분기까지 현 금리를 유지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내다봤다.

금리 동결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는 그만큼 주요국 경제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주택시장 붕괴가 금융시장을 강타한 데 이어 실물경기까지 파급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고용도 계속 악화돼 7월 실업률은 4년 만의 최고 수준인 5.7%를 기록했다. 세금환급 조치에 힘입은 소비가 가까스로 경기를 떠받치고 있지만 정책 효과가 소진되면 성장률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다. 실제 6월 소비지출은 0.6% 늘어나는데 그쳐 증가율이 전달보다 0.2%포인트 낮아졌다. 미셸 메이어 리먼브러더스 이코노미스트는 "국제 유가 하락으로 인플레이션 우려는 다소 진정된 데 반해 경기 회복은 가시화될 기미가 없는 만큼 상당기간 금리를 동결하거나 오히려 내년 초 한두 차례 금리를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유럽은 미국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 미국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터지자 작년 9월부터 공격적으로 기준금리를 낮춰 완충역할을 한 데 반해 ECB는 물가를 선제적으로 잡기 위해 오히려 금리를 올렸다. 금리 인상에 따른 부담은 기업들에 전가돼 경기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마켓이코노믹스 통계를 인용해 유로존(유로화를 사용하는 15개국) 국가 중 14개국의 7월 제조업 경기가 위축되는 등 경기 둔화세가 확산되고 있다고 이날 보도했다. 독일을 제외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아일랜드 네덜란드 등 14개 국가의 구매자관리지수는 일제히 기준점인 50을 밑돈 것으로 조사됐다. 유로화를 사용하지 않는 영국의 제조업 경기도 물가 상승의 여파로 1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ECB는 현재 연 4.25%인 기준금리를 한두 차례 0.25%포인트씩 낮춰야 할 것이란 관측이 시장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상당수 전문가는 BOE도 현재 연 5.0%인 기준금리를 내년 말까지 4.25%까지로 낮출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하지만 ECB와 BOE로선 인플레이션이 초래할 파장에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유로존의 7월 소비자물가는 작년 같은 달보다 4.1% 상승해 1997년 이후 최고 오름폭을 기록했다. 이는 ECB의 관리 목표치인 2%의 두 배나 된다. 위험 수위에 달한 물가 상승 압력 속에 경기를 살리기 위해 어떤 통화정책을 써야 할지 중앙은행들의 고민이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뉴욕=이익원 특파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