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주 < 서강대 명예교수·경제학 >

한때 2000대 고공행진을 하던 코스피 지수가 요즘은 1600 선에서 큰 폭으로 요동치고 있다. 본국 사정이 다급해진 외국인이 매도세로 돌아서 국내주가를 토막낸 탓이다. 쉽게 돈 번다고 국내 펀드시장에 몰려들었던 개인투자자들이 무리지어 갈팡질팡한다. 한 수 가르쳐줄 투자 고수가 없는가?

1912년 미국 테네시주에서 장래 고수가 태어났다. 명석한 머리 덕분에 예일대학 학사,옥스퍼드 대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월 스트리트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절호의 투자기회를 금세 냄새 맡았다. 직장상사에게 1만달러를 빌려 상장주식 중 시가 100달러 이하의 주식 1주씩 100주(적자회사 주식 포함)를 매입했다. 4년 후 주식을 모두 매각하니 부채를 갚고도 차익 4만달러가 남았다. 이것은 그의 투자성공담의 짧은 예고편이었다.

1954년 자기이름의 펀드운용회사를 설립했다. 곧 그의 독특한 투자원칙과 철학은 투자업계의 전설이 되었다. 그의 성공비결은 무엇이었나?

첫째 리스크를 잘 계산해라.앞에 소개한 예도 무작정 한 도박이 아니라 전쟁발발 후 군수물자 수요증대,생필품 가격등귀 등으로 시장 전반의 주가상승을 미리 예상한 리스크 테이킹 즉,투자 행위였다.

둘째 낭비말고 절약하라.근면과 절제가 줄곧 생활철칙이었다. 결혼 초기에 소득의 절반을 잘라 저축부터 하고 구두쇠로 살기로 아내와 약속하고 굳게 지켰다. 빚 지기를 싫어해 주택구입도 현금만으로 지불했다. 평생 비행기 일등석을 이용한 적이 없고 운전기사를 따로 두지 않았다. 거부가 된 노후에도 직접 몰던 롤스 로이스도 중고시장에서 구입한 자동차였다. 그는 평생 1주 60시간 일에 몰입하며 살았다.

셋째 저평가주식을 골라 장기투자하라.그는 '최대 비관점' 즉 바닥에서 구입해 고점에서 매각하는 원칙에 철저했다. 한번 매입한 주식은 평균 6~7년간 오래 보유했다. 유행을 타는 복잡한 투자 기법들(차트 등)을 불신하고,매출액ㆍ수익 등에 기초한 기업의 펀더멘털 가치에 눈독을 들였다. 1999년까지 45년간 그의 회사는 투자원금의 550배 수익을 기록했다.

넷째 해외증시에 눈 돌려라.그는 1960년대 후반 일본,그 후 신흥경제권에 한발 앞서 투자했다. 사회주의 국가,정부규제가 심한 나라는 회피하고 자유시장경제를 선호했다. 그는 철저한 자유시장주의자였다.

다섯째 세금을 줄여라.구두쇠인 그에게 의당 절세가 주요 관심사였다. 1968년 본인은 부인했지만 미국 국적을 버리고 영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 동기 중 하나는 낮은 세율의 유인이었을 것이다. 만년에 세금 없는 바하마에 이주해 영국ㆍ바하마 이중국적자로 살았다.

모친의 영향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적극적으로 자선기부사업에 참여했다. 그는 종교적으로 편협하지 않아 유대교,힌두교,불교,이슬람교에도 기부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발전하는 과학과 낙후된 종교를 접목하는 일을 적극 지원했다. "일반적으로 악인으로 보이는 사람도 마음 속에서 악행을 의도하지 않는다"고 그가 남긴 말은 씹어볼 만하다. 그는 자기에게는 엄격한 편이었지만,타인에게는 관대했다. 테레사 수녀,작가 솔제니친,빌리 그레이엄 목사,그리고 많은 저명학자들이 그의 수혜자였다.

옥스퍼드 등 다수의 대학들이 그의 기부금으로 더욱 학문의 전당 구실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짠돌이 조막손이었으나 사회에 대해서 너그러운 큰손이었다. 두 주일 전(7월8일) 바하마에서 존 템플턴,그는 95세 나이에 폐렴으로 영면했다.

요즘 같은 한국 재계 수난의 계절,요동치는 증시혼란기에 한국의 템플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