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기업인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다. 유가 폭등으로 인한 원자재가격 상승,소비 위축 등으로 경기 둔화가 본격화되고 있어서다. 이 중에서도 제약회사 CEO들의 어깨가 축 처져 있다. 정부가 의료비 증가 억제를 위해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의약품 가격을 대폭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만난 N사의 대표이사는 "지난 30년 중 올해 경영여건이 최악"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고령화 추세 등에 따라 올해와 내년 중 대규모 건강보험적자 발생이 확실시되는 만큼 정부 조치의 불가피성은 이해된다. 또 제약사가 판매 촉진 차원에서 병ㆍ의원 등에 리베이트를 제공하는 폐습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약가에 일부 거품이 끼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수년간 부도로 문 닫은 제약사가 찾기 힘들다는 점만 봐도 제약산업이 중소제조업이나 건설 등 다른 분야에 비해 수익성이 높았고 인ㆍ허가란 진입장벽으로 혜택을 입었음도 부인하기 힘들다.

문제는 보험재정 안정을 위해 제약업계만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면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겠지만 심각한 부작용도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시판 중인 의약품에 대한 약효 및 경제성 재평가에서 고지혈증 치료제 약가는 22.6~35.9%가량 삭감됐다. 조만간 고지혈증치료제 시장보다 3배가량 큰 연 매출 1조원 규모의 고혈압치료제에 대한 심사가 시작되는 등 약가인하 작업이 가속화될 예정이다. 이처럼 정부가 제약사들의 순이익을 20∼30%가량 환수한다면 당장 연구개발(R&D) 의욕이 꺾일 것은 불보듯 뻔하다. 만약 제약사들이 적정마진이 기대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약이나 기존 약품보다 효능이 개선된 개량신약 개발을 소홀히 한다면 국내 시장은 제품개발 능력이 탁월한 다국적제약사의 '놀이터'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국내 1위 제약사인 동아제약의 지난해 매출이 6359억원에 R&D 투자비는 396억원이지만 세계 최대 제약사인 화이자의 경우 매출 484억달러(48조원)에 R&D 투자비가 81억달러(8조1000억원)에 이른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약가인하 정책은 한계에 달한 제약사들의 퇴출 및 인수합병(M&A)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업계에서는 세계 제약사 랭킹 50위 수준인 연매출 1조5000억원 이상은 돼야 다국적제약사와 경쟁할 여건이 마련된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빠른 기간에 무리하게 추진한다면 국내 제약산업의 붕괴라는 치명적인 사태를 야기할수 있다. 정부는 제약사 간 자율적인 구조조정이 나타나고 연구개발과 마케팅 분야에서 전략적 제휴가 원활히 이뤄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입안,시행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제약사들도 변신해야 한다. 업체 간에 생산품목이 대부분 겹칠 정도로 다양한 복제약을 생산하는 방식으론 M&A에 따른 시너지 효과도 기대하기 힘들며 글로벌 경쟁력 확보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를 위해 특화된 의약품 생산에 나서는 방안을 면밀히 검토할 때다. 항우울병과 치매치료제로 연간 3조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덴마크의 룬드벡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대주주가 뿌리 깊은 소유의식에서 벗어나는 것도 절실한 과제다.

최승욱 과학벤처중기부장 swch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