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 히딩크(62) 감독이 조국 네덜란드에 '어퍼컷'을 날렸다.

일전을 앞두고 네덜란드의 역적이 되고 싶다던 말 그대로 20년 만의 정상 탈환에 도전한 조국에 비수를 꽂았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러시아는 22일 오전(이하 한국시간) 스위스 바젤의 상크트 야콥파크에서 열린 2008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2008) 8강에서 연장 후반 드미트리 토르빈스키와 안드레이 아르샤빈의 연속골 등으로 우승 후보 네덜란드를 3-1로 돌려 세웠다.

러시아가 이 대회에서 준결승에 오른 것은 구 소련 해체 이후 처음.
소련 해체 이전을 포함하면 결승에서 네덜란드에 패해 준우승을 차지한 1988년 이후 20년 만이다.

러시아가 네덜란드를 제압한 것은 이번 대회 최고 이변으로 꼽힐 만하다.

네덜란드는 조별리그에서 2006 독일월드컵 우승.준우승국인 이탈리아(3-0 승)와 프랑스(4-1 승)를 잇따라 완파하는 등 3전 전승, 조 1위로 8강에 올랐다.

1실점했지만 조별리그 16개국 중 최다인 9점을 뽑는 막강 화력을 뽐냈다.

반면 러시아는 스페인에 1-4로 대패한 뒤 지난 대회 챔피언 그리스를 1-0으로 누르고 3차전에서는 한 수 위 전력으로 평가 받던 스웨덴을 2-0으로 꺾어 조 2위로 힘겹게 8강 대열에 합류했다.

객관적 전력에서는 네덜란드의 우세가 점쳐졌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사정은 달랐다.

네덜란드 국가대표팀과 명문 클럽 PSV에인트호벤을 이끌어 상대를 훤히 꿰뚫고 있는 히딩크 감독의 전략이 다시 한번 빛났다.

이날 경기를 지배한 것은 러시아였다.

하루 먼저 조별리그를 끝낸 네덜란드 선수들에게 휴식 시간은 더 많았지만 몸은 러시아 선수들이 훨씬 가벼워 보였다.

반면 네덜란드는 공.수에서 모두 무기력했다.

공격 빈도나 결정적인 득점 기회도 러시아가 많았다.

다만 후반 11분 선제골을 넣었던 주전 스트라이커 로만 파블류첸코가 1-1로 맞선 연장 전반 7분 날린 오른발 슈팅이 크로스바를 맞고 나오는 등 골운이 따르지 않았고, 상대 골키퍼 에드윈 판데르사르의 선방이 이어져 득점 기회를 쉽게 살리지 못했다.

히딩크 감독은 1-0으로 앞선 상황에서도 결코 리드를 지키기 위한 수비적 경기 운영을 하지 않았다.

교체도 세 명 모두 공격력을 갖춘 선수들로 하면서 오히려 점수 차를 더 벌리려는 의지를 보여줬다.

비록 종료 4분을 남겨 놓은 후반 41분 뤼트 판 니스텔로이에게 동점골을 내줬지만 연장전에서도 러시아의 공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승골은 결국 교체 멤버였던 토르빈스키에게서 터졌다.

이날 처진 스트라이커로 나와 결승골을 어시스트하고, 직접 쐐기골을 넣은 아르샤빈도 히딩크 감독이 왜 명장인지 재확인해 줬다.

아르샤빈은 이번 대회 예선 안도라와 마지막 경기에서 퇴장을 당해 본선 조별리그 1, 2차전을 뛸 수 없었다.

자칫 3차전 한 경기를 위한 선수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히딩크 감독은 최종엔트리에 그의 이름을 포함했다.

아르샤빈은 스웨덴전과 이번 네덜란드전에서 잇따라 득점포를 가동하며 팀의 4강행에 큰 힘을 보탰다.

네덜란드 대표팀 지휘봉을 잡아 1996년 대회 8강에 올렸고,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는 4강까지 밟았던 히딩크 감독은 이후 러시아를 포함해 세 차례 축구 변방의 대표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는 가는 곳마다 기적을 일궜다.

한국을 맡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썼고, 호주를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올려 놓은 독일월드컵에서는 내친 김에 사상 첫 16강까지 이끌었다.

이번에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러시아다.

유로2008 예선에서 축구 종가 잉글랜드를 따돌리고 러시아를 본선 무대에 올려 놓은 히딩크 감독은 거침 없는 행보로 `그라운드 반란'을 지휘하며 결승 진출까지 바라보게 됐다.

(서울연합뉴스) 배진남 기자 hosu1@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