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 자유기업원 원장 >

지난 주 홍콩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가했다가 모리스 맥티그씨와 옆자리에 앉아 저녁을 하게 됐다.

내게 건넨 명함에 적힌 그의 이름 뒤에는 Q.S.O라는 생소한 글자가 붙어 있었다.

뭐냐고 물었더니 'Queen's Service Order'란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뉴질랜드 관료에게 내리는 최고의 훈장 같은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1984년 이후 뉴질랜드의 여러 부 장관을 거치면서 정부 개혁을 주도했던 사람이었다.

뉴질랜드의 시장경제적 개혁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우리의 광우병 시위가 화제로 떠올라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뉴질랜드의 농업으로 넘어갔다.

뉴질랜드의 농산물이 품질과 가격 모두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정도는 나도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나는 그 이유가 농토가 넓고 기후가 좋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1984년까지 뉴질랜드 농업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뉴질랜드의 농업이 지금처럼 될 수 있었던 것은 농업을 모든 나라 농민들과의 시장 경쟁에 노출시킨 결과라고 했다.

원래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량 공급 기지였던 만큼 농산물의 대부분을 영국에 수출해왔다.

그러나 1,2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으로의 수출이 어려워졌고,또 1970년대에는 영국이 유럽공동체(지금의 유럽연합)에 참가함에 따라 뉴질랜드는 영국 시장에 대한 특권적 지위를 잃게 됐다.

농산물의 판로 상실은 농민들뿐만 아니라 뉴질랜드 전체에 심각한 재앙이었다.

이러한 어려움에 대한 뉴질랜드 정부의 대응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들이었다.

외국 농산물의 수입을 통제하고,농협 같은 조직을 통해 가격을 유지해주었다.

수많은 농업보조금과 재해보험,저리융자 등이 이어졌다.

급기야 정부 예산의 상당 부분을 보조금이 차지하게 되고 정부는 적자 예산에 허덕이게 된다.

하지만 농민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소득은 제자리걸음인데 물가는 계속 올랐다.

그러던 차에 1982년 뉴질랜드 농민연합으로부터 예기치 않았던 내용의 보고서가 발표된다.

정말 어려운 것은 물가 상승이며,그것의 근원은 농업보조금으로 인한 적자예산인 만큼 보조금을 폐지하고 물가를 잡으라는 것이었다.

농민들 자신이 자신들에 대한 보조금을 없애라면서 들고 일어선 것이다.

1984년 집권한 노동당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철저한 시장경제 개혁을 시작한다.

수입관세를 낮추고,공무원을 파격적으로 줄이며 민영화를 단행했다.

농민들이 스스로 제안한 대로 농업에서도 모든 보호막과 보조금이 폐지됐다.

뉴질랜드의 농업은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 노출됐다.

당연히 아픔이 따랐지만,우려했던 것보다는 훨씬 작았다.

농민의 1%가 도산했거나 농업을 떠났다.

그러나 남은 99%는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

농업생산량은 10배로 늘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가 궁금했다.

맥티그씨의 답이 가슴에 와 닿는다.

"사람은 누구나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호막과 보조금은 그 잠재력을 묻어버립니다.

경쟁의 압력을 느낄 때에야 그 잠재력이 드러납니다.

뉴질랜드 농민들은 스스로 그 길을 택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개방은 역사의 대세다.

광우병 시위로 미국과의 FTA를 조금 연기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10년,20년 뒤에도 그럴 수는 없다.

미국과 하지 않더라도 EU,중국,일본,뉴질랜드 같은 나라들과는 서로 시장을 개방해야 할 것이다.

그때마다 농업은 걸림돌이 될 것이다.

2001년 뉴질랜드 농민연합의 알리스터 파울슨 회장이 영국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다른 나라의 농민들에게 전했던 말이 있다.

"정부의 보호막을 벗어버리세요.

한시라도 빨리." 우리 농업의 기회도 같은 곳에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