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정치공방의 장으로 변질 우려도

식량가격 폭등에 따른 전 세계적 식량위기를 타개하고자 마련된 로마 유엔 식량안보정상회의가 사흘간의 공식 일정을 모두 마치고 국제사회의 강한 식량위기 대처 의지를 담은 공동선언을 채택하고 5일 폐막했다.

이번 정상회의 기간에 참석 정상들과 각료들은 글로벌 식량위기의 심각성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그 원인과 대책을 둘러싸고 시종일관 열린 토론을 벌였다.

사흘간의 토론의 결과는 5일 오후 자크 디우프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사무총장이 폐막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유엔 식량안보정상회의 공동선언문에 집약되어 있다.

공동선언 채택 과정에서 40여년에 걸친 미국의 경제제재에 불만을 품은 쿠바가 "식량은 일방적인 정치적 압력의 무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문구를 삽입해야 한다고 버티는 바람에 일부 진통을 겪기는 했지만 그 문구를 받아들이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글로벌 식량위기를 다루고자 했던 정상회의가 정치공방의 장으로 변질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공동선언문은 "현 식량위기로 인한 피해자들의 고통을 경감하고, 식량생산을 촉진하며, 농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한다"고 밝히고 있다.

당장은 최근 글로벌 식량위기로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는 저개발국 및 개도국 주민들을 위한 긴급 구호를 비롯한 단기 대응책을 실행하겠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8억5천만명이 이미 식량부족으로 고통을 겪어왔으나, 최근 식량가격 폭등으로 인해 1억명이 그 대열에 추가됐다.

식량생산의 촉진과 농업 투자 등은 식량위기에 대한 중.장기 대책에 속한다.

단기적으로는 당장 기아에 시달리는 주민들을 위해 긴급구호에 치중해야 하지만, 식량을 증산하고, 그 기반이 되는 농업투자를 확대하지 않고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참석자들의 공감대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반기문(潘基文)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의 인구 증가 등에 따른 식량수요의 증가를 감안할 때 2030년까지 식량생산을 50% 더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식량위기의 최대 취약지역인 아프리카의 소농들에 씨앗과 비료를 지원하고 농업 인프라를 지원해 스스로 먹고살도록 하자는 `제2의 녹색혁명'이 추진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이다.

이와 관련, 아프리카 녹색혁명을 위한 동맹'(AGRA)의 의장인 코피 아난 전 유엔총장은 4일 FAO와 국제농업발전기금(IFAD), 세계식량계획(WFP) 등 유엔 산하 3개 기구 대표들과 아프리카 소농 지원을 위한 파트너십 협약에 서명했다.

여기에는 특히 현재의 식량가격 폭등이 당장은 저개발국 및 개도국 주민들에게 커다란 위기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기회로도 작용할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반 총장이 3일 개막연설을 통해 "이번 위기가 우리 모두에게 위협이 되고 있지만 동시에 과거의 정책들을 교정할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며 "우리는 농업을 다시 활성화할 수 있는 역사적인 기회를 맞고 있다"고 역설한 것도 그런 판단에서다.

그러나 최대 쟁점이었던 바이오연료를 둘러싼 부분은 일단 미봉으로 끝나 이를 두고 일부 회원국들로부터 불만 섞인 목소리들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공동선언문은 "도전과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면서 "우리는 바이오연료의 생산 및 사용이 지속가능 하도록 보장하는 동시에 글로벌 식량안보의 달성 및 유지를 위해서도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확신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같은 `외교적 수사'로 바이오연료 문제를 봉합한 것은 미국과 브라질 등 바이오연료 최대 생산국들이 바이오연료와 식량위기를 연관시키는 것에 거세게 반발한 데다, 그 같은 반발을 제압할 뚜렷한 근거가 확보되지 못한 것과 무관치 않다.

이를 놓고 미국과 브라질 등은 바이오연료의 원료를 제공함으로써 농민들의 소득 증대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옹호하고 있는 반면, 상당수는 바이오연료 생산으로 인해 식량생산에 쓰일 농지가 줄어들고 있다면서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이날 공동선언문 이외에 구체적인 실행계획(Action Plan)은 내놓지 못했지만, 앞으로 구체적 실행계획의 근간으로 활용될 수 있는 긴급 및 단기 조치와 중.장기 조치에 관한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했다는 점은 평가받을 만 하다.

유엔 식량안보태스크포스 조정역인 존 홀름스 유엔 인도주의 담당 사무차장은 "실행계획에 대한 폭넓은 컨센서스가 조성되고 있다"면서 "실행계획은 이달 말 일본에서 열리는 G8(서방선진7개국+러시아) 정상회담에 제시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동선언문에 담긴 긴급 및 단기조치에는 ▲식량위기 피해 국가 및 주민에 대한 긴급 식량지원 확대, 저소득국에 대한 국제수지 및 재정 지원 ▲저소득국 소농들의 식량 증산을 지원 씨앗, 비료, 동물사료 지원 ▲저소득국 식량비축 능력 확보 및 식량안보 리스크 강화 방안 등이 포함되어 있다.

중.장기 대책에는 ▲`주민 위주의 정책' 이행 ▲기후변화 대처와 관련한 금융 시스템 및 투자로부터 농.어민이 혜택을 받도록 적절한 정책우선순위를 농.임업, 어업에 부여 ▲식량.농업 관련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 가속화 등이 담겨 있다.

나아가 일부 농산물 수출 개도국들이 자국의 식량안보를 위해 식량수출 금지 및 규제 조치를 위한 것과 관련해 "최소화"를 촉구했으며, 무역장벽 및 시장왜곡적 정책들을 줄이는 국제무역의 자유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도 포함됐다.

특히 참석자들은 현재 제네바에서 진행 중인 세계무역기구(WTO)의 도하개발어젠더(DDA) 협상이 글로벌 식량위기의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공감대를 이루고 "신속하고 성공적으로 타결돼야 한다"고 촉구하고 나선 점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비록 DDA가 개도국의 식량안보에 이바지하고 무역 능력을 구축.개선하기 위해서 `무역을 위한 지원 패키지'(aid for trade package)가 이행돼야 한다고 지적하기는 했지만, `DDA 만능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적지 않아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이와 관련, 옥스팜 인터내셔널과 액션에이드 인터내셔널을 포함해 50개국에서 237개 국제 NGO와 농민단체, 노조, 시민사회단체들이 반 총장과 파스칼 라미 WTO 총장 등에게 3일 공동 서한을 보내 "현 식량위기에 대한 무능한 위기관리는 지난 30년간에 걸친 농업 부문의 시장규제 완화의 실패를 뜻한다"라면서 "도하라운드의 타결이 현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 우려를 금치 못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당장 시급한 지원을 원하는 아프리카 지역 일부에서는 "구체적인 대책은 없고 말 뿐인 회의였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지만, 여하튼 40여개국 정상들을 비롯해 151개 유엔 회원국 고위급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당면한 글로벌 식량위기를 놓고 입장을 교환하고 전 세계에 `경각심'을 일깨워 준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로마 식량안보정상회의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둔 데는 지난 해 기후변화에 이어, 글로벌 식량위기를 `올해의 화두'로 삼고 조용하면서도 집요한 지도력을 발휘해온 반 총장의 공도 적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로마연합뉴스) 이 유 특파원 ly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