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민 < 연세대 교수·경제학 >

작년도 세계잉여금(歲計剩餘金)을 놓고 정부와 여당이 엇박자를 내고 있다.

정부는 성장률을 올리기 위해 용처가 정해지지 않은 4조8000여억원을 올해 세입에 이입해서 추경을 편성하겠다고 한다.

반면 한나라당은 물가 안정과 작은 정부 원칙에 역행한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결국 이 문제는 이달 개원하는 18대 국회에서 주요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성장률을 올리기 위해 추경을 편성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보다 국가재정법의 취지와 어긋난다.

'법을 지키는 정치'야말로 '보수정권'의 첫째 원칙 아닌가.

안 그래도 공공기관장 인사 등에서 법치의 원칙이 무너지고 있는데 추경까지 더해져서는 곤란할 것이다.

경제적으로 보아도 그렇다.

물가안정을 희생한 성장은 2~3년도 버티기 어렵다는 것이 세계 경제사의 교훈이다.

거기에다 지금 세계는 1970년대식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인데 한국도 물가가 좀 오르면 어떤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현재 인플레이션은 선진국과 개도국 간에 패턴이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은 아직 근원인플레이션은 안정돼 있는 선진국형에 가깝지만,이 단계에서 물가 안정을 도외시하고 성장에 집착했다가는 개도국형으로 추락해서 본격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추경의 대안으로는 감세를 생각할 수 있다.

작은 정부라는 원칙에 맞고 물가를 자극하는 부작용도 작다.

그러나 감세는 세원 확보라는 장기적 과제가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정부가 근본적인 세제 개편 작업을 한다고 하니 그에 맞춰 마스터플랜을 짜서 하는 것이 맞다.

일각에서는 추경을 하되 서민을 위한 재원으로 쓰자는 주장도 있다.

여당의 신임 정책위 의장의 말처럼 예컨대 서민이 제도 금융권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보증재원을 마련하는 데 쓰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경제적 효과만 따진다면 이 주장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서민을 위한 대책을 세우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양극화는 여전히 무자비하게 진행되고 있는데다 새 정부 들어서 공을 들이고 있는 한ㆍ미,한ㆍ중 자유무역협정 등으로 구조조정은 광범위하게 일어날 전망이다.

그 부담은 무엇보다 서민들에게 돌아갈 텐데,그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작은 정부'는 이런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관료주의를 최소화하면서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민을 위한 추경도 법치의 원칙과 맞을지는 의문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서민을 위한 대책 역시 체계적인 마스터플랜을 갖고 마련해야지 돈 본 김에 하자는 식은 안 될 노릇이다.

세계잉여금 4조8000억원은 국가채무를 줄이는 데 쓰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작은 정부 원칙에도 맞고 물가를 자극하는 부작용도 가장 작다.

더욱이 외환위기 이후 급속히 늘어난 국가채무는 하루 빨리 줄여야 하는 사정이다.

단기자본 시장을 완전히 열어놓은 상태에서 늘어난 국가채무는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비록 다른 선진국에 비해 국가채무 비율이 높지 않다고 하지만,연금 등에 잠재하고 있는 우발채무를 고려하면 그렇게 보기 어렵다.

연금 개혁은 지지부진한데 노령화는 급속히 진행되고 있으니 국가채무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는 사정인 것이다.

세계잉여금 4조8000억원이 국민경제 전체로 보아 큰 돈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쓰는가는 새 정부와 여당의 국정 방향을 설정하는 이정표가 될 전망이다.

법치와 작은 정부,단기적 성과보다는 장기적 목표를 중시한다는 '보수정권'의 원칙을 지키는 이정표가 세워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