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독립할 때 제일 큰 주는 버지니아이고 뉴욕주는 버지니아주의 절반 정도로 크기는 다섯 번째였다.

뉴욕주는 다른 주들에 비해 좁은 허드슨 강을 따라 북쪽으로 200㎞ 올라가서야 평야가 있고 농사짓기에도 일기가 불순했다.

그래서 필라델피아가 수도이자 가장 큰 항구도시였으며 뉴욕은 보스턴보다도 작은 도시였다.

미국은 광활한 대평원과 대서양을 가로막는 애팔라치아산맥 때문에 인구의 대부분은 해안평야에 살고 있었다.

이 산맥은 서남쪽으로 뻗었으므로 북부는 해안평야가 좁고 남쪽으로 갈수록 넓어져서 전반적으로 남부의 인구가 많고 경제규모도 컸다.

이 산맥의 틈을 관통하는 뱃길을 만들어 미국경제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것이 이리(Erie)운하의 건설이다.

이것은 뉴욕시에서 허드슨강을 따라 올라가다가 5대호 중 하나인 이리호(해발 183m)와 연결하는 584㎞의 운하로서 당시의 기술력이나 자본력으로 볼 때는 무리한 발상이었다.

제퍼슨 대통령은 이 제안을 '미친 짓'이라며 거부했으나 드위트 클린턴 뉴욕 주지사의 결단력으로 비로소 실현됐다.

그는 1817년 운하건설을 주지사 선거공약으로 내걸고,당선되자 곧바로 건설을 강행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클린턴의 바보짓'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1825년 운하가 완성되자 운임은 20분의 1로 떨어지고 15년 만에 물동량은 300배 이상 증가했다.

수많은 이민자들이 뉴욕항과 이리운하를 거쳐 5대호 연안의 대평원에 정착했으며 여기서 수확한 곡물을 유럽으로 수출함으로써 미국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뉴욕항은 미국 내 다른 항구의 물동량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물량을 취급함으로써 미국경제의 중심이 됐다.

만일 이리운하가 건설되지 않았으면 버지니아주가 미국의 중심이 됐을 것이며 남북전쟁의 결과도 달라졌을 것이다.

또 미국의 정치.사회 풍토도 남미와 흡사하게 됐을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역사가 조그마한 사건에 의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이리운하는 1959년 3만t급 선박이 운항할 수 있는 세인트로렌스 운하가 건설될 때까지 미국의 대동맥이었으며 운하건설 경쟁의 신호탄이 됐다.

미국은 철도와 고속도로망이 발달했지만 지금도 4만2000㎞에 달하는 내륙수운이 총물동량의 17%인 7억t을 운송한다.

그리고 주요 운하들은 모두 미군 공병단이 건설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확장.보수하고 있다.

한국도 수천년 동안 왜구의 침입으로 인구의 대부분이 해안평야를 피해서 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비단 한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럽은 산업혁명 후 물동량이 급증함에 따라 인구중심과 바다를 연결하는 운하들이 건설돼 경제발전을 견인했다.

한국은 그러한 운하의 융성기 동안 쇄국정책과 식민지로 지내면서 이를 생략한 채 21세기에 진입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강과 낙동강을 축으로 인구의 과반수가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값싸며 친환경적인 내륙수운을 개발하지 못한 것이다.

혹자는 반도국가라서 연안해운이 이를 대신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한국은 인구중심이 내륙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를 이용하기 위한 시간과 비용이 크다.

그리고 유럽의 경우 총 운하물동량의 30% 이상이 50㎞ 이내 운송되는 것을 보면 반도국가라도 내륙수운이 꼭 필요하다.

운하가 건설되면 운하의 양안이 임해공업단지가 되므로 1600㎞의 부두를 갖춘 해양국가가 되는 것이다.

특히 대구,광주 및 대전과 서울은 1만~5만t급 이상의 RSB(River-Sea-Barge)가 중국,일본 및 동남아와 직항하게 되므로 한반도 전체가 아시아의 물류거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