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높아 골이 깊어진 걸까.한국영화 위기론이 심각하다.관객은 줄고 수출도 형편없어 지난해 제작된 112편 중 13편만 손익분기점을 넘겼다는 마당이다.1편당 평균제작비는 42억원인데 매출은 24억원에 불과하다.이러다 공황 상태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온다.

이상한 일이다.1990년대 후반 이후 정부는 영화산업 육성에 팔을 걷어붙였다.2000년 3월엔 '영화산업 진흥 5개년 계획'을 내놨다.'투자를 활성화,제작 편수를 늘림으로써 시장 점유율과 수출을 높여 영상산업 강국을 만든다'는 취지였다.

세금을 감면해주고 2004년엔 영화진흥위원회가 앞장서 영상투자조합을 결성,제작비를 댔다.1000만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가 등장하고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은 급등했다.그러나 '황금알을 낳는 거위'같던 영화산업의 현실은 참담하게도 투자수익률 마이너스 43%다.

정부 정책과 엄청난 투자 모두 영화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얘기다.이유는 복잡하지 않다.시장 개척 없이 투자와 공급만 늘린 결과다.1990년대 중반 영화시장 규모는 1조4500억원.극장 수입은 적었지만(2500억원) 비디오 시장(1조2000억원)이 컸다.2006년엔 극장 수입은 늘었지만(1조원) 비디오 시장이 급감(3600억원),전체 규모는 오히려 줄었다.겉만 화려했지 실은 제로섬 게임이었다는 얘기다.

여기에 수출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뻔한 내용,황당한 전개로 국내 관객마저 잃고 있다.물론 작품이 전부는 아니다.잘 쓴 책이 꼭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아니고 아이디어 상품이 마케팅에 실패,후발 상품에 대박을 내주는 수도 흔하다.그러나 정말 잘 만든 작품이 외면당하는 일은 적다.신선한 소재,독특한 시각,절묘한 심리 묘사와 대사가 있으면 관객은 감동한다.'왕의 남자''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추격자'의 성공은 그 증거다.

여건이 어렵긴 해도 타개할 길이 없진 않은데 영화계가 택하는 길은 달라 보인다.관객 입장에서 볼 때 '무극'의 경우 아무리 한중합작 영화라도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를 기어다니게 한다는 설정은 납득하기 어렵고,'중천'의 줄거리는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제작과정에서 검증이 안 되는가 했더니 아니라고 한다.철저한 시장 조사와 시나리오 모니터링,촬영 뒤 편집본 시사회 뒤 재편집 등 과학적 방법을 총동원한다는 것이다.그렇다면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그들만의 조사와 검증에 문제가 있거나 검증은 시늉일 뿐 투자자 혹은 몇몇 힘있는 사람 마음대로 하는 것일지 모른다.정보의 유통속도는 무섭고 관객의 눈은 높다.'누가 나오고 누가 만들면 된다'거나 '요즘 트렌드는 이렇다'에 맞춰 대강 만든 뒤 스크린만 많이 확보하면 된다는 식은 더이상 통하기 어렵다.

한국영화가 살자면 돈 타령도,관객의 변덕 탓도 하지 말아야 한다.스타에 매달리지도,돈 댄 사람 눈치를 보느라 잘못된 캐스팅을 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해외시장을 겨냥한답시고 국내 정서에 맞지 않는 작품을 내놓는 것도 곤란하다.끼리끼리 궁리하지 말고 보다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아이디어와 소재를 찾고,탄탄한 각본을 만들고,이를 감수할 인재도 늘려야 한다.정부의 지원 또한 제작비에 쏟아부을 게 아니라 인력 양성 및 인재풀 확보로 돌리는 게 마땅하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