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월가가 크게 술렁였다.

미국 최대 의료보험사인 웰포인트의 신임 최고경영자(CEO)로 의외의 인물이 지목됐기 때문이다.

유력한 후보였던 데이비드 콜비 최고재무책임자(CFO)와 존 와츠 판매책임자를 물리치고 의료보험업계의 제왕에 오른 이는 앤젤라 브랠리 법률자문 겸 공보책임자(46).탁월한 투자 능력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콜비 CFO와 달리 거의 무명이었다.

거기다 보험과 상관없는 법률가 출신의 40대 여성이라는 점이 알려지자 투자자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가장 논쟁적인 비즈니스'의 수호자

브랠리가 웰포인트 CEO가 된 지 반년.'벼락출세'라는 시선은 어느새 사라졌다.

그는 주간지 포천이 선정한 상위 50대 대기업을 이끄는 첫 여성 CEO다.

웰포인트는 여성이 운영하는 회사 중 세계 최대 규모다.

선배 여성 CEO인 인드라 누이(펩시코),패트리샤 워츠(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도 웰포인트의 매출 560억달러는 달성하지 못했다.

지난달 월스트리트저널은 '올해 가장 촉망받는 여성' 1위로 브랠리 CEO를 지목했다.

업계 비중 3분의 1에 달하는 거대 기업을 이끌고 있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의료보험을 둘러싼 논쟁을 선두에서 이끌면서 업계의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낮은 보험가입률과 보장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공공의 역할을 강화하는 추세다.

이 같은 흐름에 맞서 사보험 시장의 수호자로 나선 이가 브랠리다.

최근 브랠리 CEO는 캘리포니아주에서 200만달러짜리 광고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연방 지원을 통해 모든 시민에게 의료보험을 제공하겠다는 아널드 슈워제네거 주지사의 계획을 정면 비판하는 내용이다.

브랠리는 최대 의료보험회사 CEO로서 업계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라고 공언한다.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다보니 적도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이윤 추구가 목적인 사보험업계를 악당처럼 생각하는 시민단체들에 집중포화를 받고 있다.

미국 의료보험제도의 허술함을 고발한 다큐멘터리 '식코'의 마이클 무어 감독도 브랠리를 '공공의 적'으로 꼽는다.

브랠리는 이들의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민간보험의 효율성이야말로 미국인의 건강 수준을 높이는 열쇠라며 맞서고 있다.

모든 국민이 비슷한 수준의 건강 보장을 받는 것은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것."우리는 비용과 질을 개선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대중의 비판이 이어지겠지만 어쩔 수 없다." 대신 사용자별로 다양한 유형의 보험 상품을 개발해 더 많은 고객을 소비자로 끌어들일 것을 주장한다.

그의 당당한 행보는 변호사라는 이색 경력에서 나온다.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이익을 관철할 수 있는지 그는 잘 안다.

포브스는 지난 9월 그에 대해 '친근한 인상 아래 완고한 중재자의 본모습이 숨어 있다'며 미국에서 가장 논쟁적인 비즈니스를 이끌 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감성적 경영 스타일 자랑

대외적으로는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처럼 완고하지만 사내에서는 부드러운 힘을 발휘한다.

감성적인 경영 마인드는 남성 CEO가 따라하기 힘든 매력 중 하나다.

그가 고안한 '기분 엘리베이터'가 대표적.웰포인트 직원들은 자신의 감정 상태가 '우울''분노'에서부터 '감사''깊은 통찰'에 이르는 각 단계 중 어디에 있는지 수시로 측정한다.

브랠리는 회의 중 참석자의 기분 엘리베이터가 어느 높이에 있는지 묻고 모두 일정 단계에 올랐을 때 논의를 마무리한다.

소비자 중심의 접근법도 그가 강조하는 여성 CEO의 강점이다.

지난 10월 그는 유명 레저정보업체 자가트와 손잡고 의료기관 평가 시스템을 도입했다.

보험 가입자들이 직접 이용한 병원과 의사의 점수를 인터넷에서 공유하는 제도다.

의료 서비스도 음식이나 레저시설처럼 소비자가 평가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가족의 건강보험을 선택하는 소비자의 70%가 여성"이라며 "의료보험업계를 여성이 이끄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아이 셋을 둔 엄마인 브랠리의 뒤에는 남편의 내조가 있다.

남편 더글러스는 브랠리가 웰포인트 경영을 맡자 회계사 일을 그만두고 양육과 가사를 전담하고 있다.

브랠리 역시 가정에 대한 의무를 잊지 않는다.

별도의 취미생활을 포기하고 남는 시간 전부를 가족에 투자하면 된다는 게 그의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해법.

◆빠른 성장-워런 버핏도 투자자

올해 브랠리가 야심차게 시작한 사업은 웰포인트만의 건강지수(MHI) 평가다.

3480만 가입자를 대상으로 건강 상태를 측정하는 국내 최초이자 대규모 사업이다.

건강 수준이 개선됐을 경우 해당 보험 매니저에게 보너스가 돌아간다.

정기 건강검진과 예방 치료를 장려해 미국인의 건강 관리를 실질적으로 돕겠다는 의도다.

한 달 77달러짜리 저가 보험상품도 주력으로 내놓았다.

브랠리의 적극적인 시장 개척 노력은 웰포인트를 올해 '빠르게 성장하는 유망기업' 2위(포천 선정)에 올려놨다.

캘리포니아,버지니아,뉴욕,조지아 등 14개 주에서 시장점유율 1위에 올랐고 올 들어 3분기까지 15% 이상의 수익증가율을 기록했다.

가치투자로 유명한 벅셔해서웨이의 워런 버핏은 최근 웰포인트 주식 보유량을 4배인 400만주로 늘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위기로 투자가 위축된 상황에서도 브랠리가 이끄는 웰포인트는 성장세를 유지할 것이라는 믿음을 피력했다.

브랠리의 앞에는 더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내년 미국 대선에서 의료보험개혁은 가장 민감한 화두가 될 전망이다.

업계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그로서는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표정은 여유롭다.

"정치인들은 내가 가는 길에 대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논쟁의 중심에서 충격흡수제 역할을 할 사람도 나다." 그때마다 그는 경영이란 바로 '내 길을 가는 것'라며 마음을 다잡는다.

"매일매일 선택의 연속이다.

우회하지 말고 정직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일에 대한 열중보다 중요한 것은 옳은 일에 대한 신념이다."

김유미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