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몰렸을까.수사가 시작됐으니 모든 의혹의 시시비비가 어떻게 밝혀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하지만 한국의 대표기업 삼성이 '마녀사냥'의 덫에 걸려 신뢰의 상실,경영의 위기로 빠져드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악의 축'으로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있는 현실은 분명 예사롭지 않다.

사업보국(事業報國)을 경영이념으로 삼아 삼성을 일군 고 이병철 회장이 이번 사태를 보고 있다면 그 회한은 또 어떨까 싶다.'김용철 폭풍'이 모든 것을 휩쓸어 지난 11월19일 그의 20주기마저 퇴색되고 만 것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의 마지막 승부수였던 반도체 사업을 제쳐놓고 오늘의 삼성,오늘의 한국경제를 설명하기 어렵다.그가 반도체 진출을 결단함으로써 삼성의 명운을 가른 1983년의 이른바 '2월8일 도쿄선언'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나라 안팎의 비웃음만 샀었다.무모한 도전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고,결국 나라경제까지 결딴내고 말것이라고 정부도 심각하게 우려했었다.하지만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호암이 우리 경제에 남긴 굵고 깊은 발자취에 대한 어떤 찬사도 부족한 이유다.그것을 가능케 한 호암 리더십의 면모는 무엇이었을까.시대를 초월한 통찰(洞察)과 비전,가장 나쁜 환경에서 한계를 딛고 일어선 도전,남들이 가는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없던 길을 만들어 간 개척,99%의 불가능을 결국 100%의 가능으로 바꾼 용기와 돌파력이다.그런 리더십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요구되는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올해 각계에서 학습열풍이 불었다는 중국 국영방송 CCTV의 다큐멘터리 '대국굴기(大國堀起)'에서 주목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15세기 이후 강대국으로 부흥한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미국은 대개 작은 섬나라였거나,보잘 것 없는 땅덩어리,땅만 넓은 황무지였다.그런데도 민족의 단결,창의적 사고,신속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앞장서 이끌고 그것을 에너지로 엮어 대국을 키워낸 핵심이 리더십임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의 표트르 1세는 신분을 감추고 서유럽으로 나가 직접 선진 과학문명과 지식을 배워 강국의 기초로 삼은 세계사에서 유일무이한 군주였다.전장에서 잠잘 때도 갑옷을 벗지 않았던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은 이탈리아 사람 콜럼버스를 통해 주인이 없던 바다를 영토로 삼은 개척자였다.사재를 모두 대학에 털어넣은 독일 빌헬름 3세와 제국통일을 이뤄낸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며 대공황의 위기를 극복하고 '팍스 아메리카나'시대를 연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등에 이르기까지….그들의 얘기는 위기를 기회로,약점을 강점으로 바꿔 한계를 넘어선 영웅담이다.

지금 우리 앞에 얼굴을 내민 누가 그런 리더십을 가졌는가.이제 20일 후 우리는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해야 한다.하지만 과연 누가 통찰과 비전,용기,결단의 리더십 가운데 한가지 덕목이라도 가졌는지조차 의문스러운 현실이 답답하다.대선판이 도덕성 시비에서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국민들은 겨우 '누가 덜 흠이 있는지'를 가려야 하는 처지에 몰린 것 또한 그렇다.

추창근 논설위원 kunn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