咸仁姬 <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

"그건 당신들 문제요."

올 여름 발칸지역을 여행하는 길에 불가리아의 한 호텔에서 경험한 일이다.

하루 종일 땡볕에 시달리다 밤늦은 시간 호텔에 도착해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덥고 습한 기운이 훅 밀려왔다.

에어컨을 작동하려고 하니 리모컨은 눈에 띄지 않고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안내 데스크로 전화를 걸었다.

조금 기다리자니 기계 수리공 복장을 한 직원이 올라왔다.

에어컨용(用) 리모컨은 없다며 천장에 달린 에어컨 상태를 점검해 보더니 "이 에어컨은 고장"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다른 방이 있는지 여부를 알아봐 주겠노라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불가리아어로 몇 마디 주고받은 뒤 전화를 끊은 직원 왈 "오늘은 빈방이 없다고 한다"며,양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방을 나가 버렸다.

당황한 우리 일행은 안내 데스크로 내려가 상황을 설명하곤 방을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우리 이야기를 듣고 난 직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That's your problem(그건-에어컨이 작동하지 않는 건-당신들 문제)"이라며 당당히 답하는 것이 아닌가.

직원의 무례함에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오른 우리는 호텔 매니저를 찾아가 다시금 에어컨이 고장 났으니 다른 방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매니저는 "오늘은 호텔에 에어컨을 켜지 않았다"란 답을 해주었다.

순간 당혹스러움을 넘어 허탈함에 기운이 쭉 빠지던 기억이 생생하다.

오랜 기간 사회주의 체제를 경험했던 여러 나라에서 빈번히 부딪치게 되는 현상 중 하나가 바로 '서비스 정신의 부재(不在)'라는 것이 여행 안내원의 변명 겸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인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자랑스레 내세움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타인을 예우하는 서비스 정신이 부재한 현실이야말로 사회주의 체제의 역설(逆說) 아니겠는지.

실제로 사회주의 체제 인간형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개개인은 생존 전략의 하나로 이중인성(二重人性)을 자연스럽게 내면화시킨다는 주장이 있다.

여기서 이중인성이라 함은 공공영역에서의 자아와 개인적 자아 사이에 일정한 괴리 내지 분리가 나타남을 의미한다.

곧 대중 앞에 서거나 조직의 일원으로 행동할 때는 사회주의 체제가 이상화(理想化)하는 인성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인상 관리를 하지만,정작 개개인의 천성이나 기질은 공적으로 표출되는 모습과 상반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단 이들 표면과 이면의 간극은 위선이나 위장이 아니라 자연스레 발달된 관례임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연구자들 주장이었다.

한 북한 전문가는 북한사회를 일컬어 한편의 거대한 무대를 연상케 한다 하여 '극작(劇作)사회'라 이름 붙인 바 있다.

그러고 보니 개인적으로 얼굴을 마주할 때면 한껏 수줍어하며 순박해 보이기만 하던 북한 이탈주민이 청중 앞에만 서면 자신의 지나온 삶을 드라마틱하게 표출하는 걸 볼 때 종종 느끼던 당혹감이 어느 정도 이해되기도 한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개성공단으로 상징되던 남북 간 경제교류 및 협력이 보다 전격적으로 활성화될 전망이다.

남북 간 교류 및 협력의 핵심에 바로 '사람'이 자리하고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제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가 지향해온 인간형의 특성에 대해 치밀하고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리란 생각이다.

20년 이상을 대북(對北) 지원 사업에 몸담아 온 분의 고백인 즉 "처음엔 우리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핏줄을 나눈 동포를 만난다는 기쁨에 만남 자체만으로도 감격에 겨워 밤을 지새우곤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는 느낌에 허탈함이 엄습해 오면서 이젠 냉정함을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구(舊) 사회주의 체제의 경험을 타산지석(他山之石) 삼아,이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지 않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