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유럽연합(EU)이 자유무역협정(FTA)의 최대 난제인 상품양허안에 대해 다음 달 4차 협상에서 한.미 FTA의 합의안을 기준으로 더 논의키로 하고 21일(현지시간) 3차 협상을 종료했다.

김한수 한국 수석대표는 이날 벨기에 브뤼셀 크라운프라자호텔에서 가진 브리핑에서 "다음 달 4차 협상에서 양측은 상품 양허개선 요청서를 교환하는 대신 한.미 FTA를 기준으로 삼아 개방도가 낮은 안을 제시한 품목에 대해 그 이유와 개선 가능성을 논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당초 기대했던 '주고받기'가 아니라 시간이 더 걸리는 방향으로 상품양허 협상을 우회하기로 함에 따라 한.EU FTA 협상의 연내 타결도 불투명해졌다. 가르시아 베르세로 EU 수석대표는 이와 관련,"우리는 시한을 둔 적이 없으며 시간 때문에 높은 수준의 FTA를 훼손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측은 다음 달 15일부터 서울에서 제4차 협상을 열어 상품양허안 등 주요 쟁점에 대한 절충에 나설 예정이다.

◆'코러스 패리티' 사실상 수용

지난 2차 협상에서 한국의 상품 양허안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던 EU는 이번 협상에서도 "실망했다"며 초반부터 압박해 들어왔다. EU가 들고 나온 논리는 "한.미 FTA에서 합의한 수준의 양허안을 내놓으라"는 이른바 '코러스 패리티(KORUS Parity)'.

협상 기간 내내 EU 측은 '코러스 패리티' 관철을 요구하며 개별 협상에 들어가자는 우리 측 제안을 거부했다. 교착상태에 빠졌던 상품 협상은 우리 측이 한.미 FTA를 준거로 상품 양허를 협의하자고 한 발 물러나면서 돌파구를 마련했다.

◆본격 주고받기? 협상전략 부재

우리 측은 이번 협상에 앞서 '본격적인 주고받기''연내 타결의 시금석'과 같은 말로 협상 진전에 상당한 자신감을 보였었다.

협상단의 한 관계자는 "자동차 농축수산물 등 일부 핵심 품목에 대해서는 품목별로 관세 철폐시기를 상호 조정하는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다"며 "품목별 협상이 이 정도로 교착될 것으로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FTA 협상에 대한 논의 구조와 협상 전략에서 EU 측이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을 간과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보수적인 안으로 출발해 점차 강도를 높여가며 본격적인 주고받기를 하는 전통적인 협상 방식을 따르고 있는 우리와 달리 EU는 그와 같은 방식을 구사하기엔 구조적인 한계가 있음에도 협상 준비과정에서 이에 대한 고려와 대응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EU는 27개국 연합체인 만큼 회원국 간 의견 조율에 물리적으로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양허안을 고치는 것도 쉽지 않다. 협상 기간 내내 "한.미 FTA에서 미국이 얻어낸 수준은 기본으로 열고 추가 논의를 하자"는 말만 되풀이한 것도 쉽게 안을 바꿀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에서 비롯된 측면이 없지 않다.

◆추급권 등 비상품 분야 일부 성과

상품 양허 분야에서 별다른 진전이 없었던 데 반해 일부 비상품 분야에서는 적지 않은 합의도 있었다. 무엇보다 지식재산권 분야에서 EU가 요구했던 추급권과 디자인 보호기간의 25년 연장안이 철회된 점은 우리의 성과로 평가된다. 추급권은 우리의 도입 불가 주장을 EU가 수용,FTA 강행규정으로 도입하지는 않기로 했다. 디자인보호기간도 현재 15년을 보장하는 한국의 법이 '10년 이상'으로 규정된 세계무역기구(WTO) 지재권협정보다 강화된 규정이라는 점을 감안해 EU 측이 요구를 철회했다. 정부조달 입찰 자격에 자국 내 영업실적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 합의도 국내 기업들엔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자동차의 비관세 장벽이나 의약품 및 핵심 쟁점에 대해서는 입장 차이만 확인하는 정도에 그쳤다.

브뤼셀=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


◆추급권=법률 용어로 저작권 관련 대상물이 여러 번 옮겨져 누구에게 가 있더라도 이것을 추급하여 행사할 수 있는 권리.미술 작품이 전문 중개상을 통해 유통될 경우 판매 가격의 일정 비율을 저작권자에게 지급해야 한다.

다만 개인 간의 직접적인 매매나 개인이 공공 미술관에 판매할 때는 적용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