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우 < 소설가 >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을은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인 동시에 감사의 계절이다.

자연으로부터 얻은 결실에 감사하기 위한 풍습은 세계 도처에서 다채로운 명절과 행사로 나타난다.

우리에게 한가위가 있는 것처럼 미국에는 추수감사절이 있고 독일에서도 지역별로 추수감사제가 열린다.

추수감사절에 미국에서는 줄잡아 3000만~3500만명의 귀성인파가 이동을 하고 4500만마리의 칠면조가 명절 요리로 대학살을 당한다고 한다.

중국은 우리와 같은 음력 8월15일에 '중추절'을 지내며 가족들이 모여 둥근 월병(月餠)을 먹는다고 한다.

이 모든 인류의 오래된 풍습은 자연으로부터 얻은 것들에 대한 한결같은 감사의 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어릴 때는 추석빔을 입고 아침에 차례를 지낸 뒤 부모님을 따라 먼 산길을 걸어 성묘를 가곤 했다.

가을에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을 조상에게 먼저 올리고 나서 후손들이 입에 대는 풍습은 선대와 후대 사이의 깊은 유대를 엿보게 하고,풍요로운 마음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 벌이는 줄다리기,씨름,활쏘기,강강술래 등의 놀이에서는 공동체의 소중함을 함께 나눌 줄 아는 따뜻한 온정이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디지털 문명이 범람하는 21세기,우리는 예전과 너무나도 다른 낯선 추석의 도래 앞에 길 잃은 유목민처럼 막막한 심정으로 서 있다.

추수의 계절이고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인데도 무엇엔가 감사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풍요로운 시기가 없었음에도 현대인들은 끝없는 빈곤과 상대적 박탈감,나아가 자아 상실감에 시달리며 감사와는 도무지 무관한 표정으로 PC 모니터를 들여다보거나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거나 TV 브라운관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볼거리,쓸거리,먹거리,놀거리가 넘쳐 시간이 짓물러터지는데도 도처에서 짜증난다,죽고싶다,못살겠다는 아우성이 창궐한다.

날마다 음식물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이는데도 한쪽에서는 기아(飢餓)와 질병에 시달리며 목숨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수다하다.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나누는 마음도 절로 사라진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부질없는 욕망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다.

우리사회의 신뢰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한심한 거짓말 대행진의 이면에 숨겨진 것도 따지고 보면 감사하는 마음의 부재에서 발생한 자기기만의 일종이다.

연예인,종교인,유명인들의 잇단 학력 위조 파문을 들여다보면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는 말이 자꾸 떠오른다.

그 정도만 해도 열 번 백 번 감사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 어째서 더 큰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사회적인 신뢰를 저버리는가.

대통령을 보좌하는 권력의 소유자들이 직권을 남용하거나 비리를 행하고 후안무치한 거짓말로 오리발을 내미는 것 역시 감사하는 마음의 부재에서 오는 심각한 망상증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 감사하고,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으로 살았다면 어째서 이런 일로 한가위를 얼룩지게 만들겠는가.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올 추석처럼 씁쓸하게 되새겨진 적도 없다.

5000년 역사를 자랑한다는 나라에서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보노라면 한가위에 떠오를 보름달을 마주 대하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한껏 유쾌하고 한가한 마음으로 농악을 하고 노래와 춤으로 어우러지며 마음을 나누던 조상들을 차례상에서도 뵐 면목이 없다.

이제 세상에는 감사하는 마음의 씨가 말라버렸다고 고할까?

감사하는 마음의 근본은 현실에 대한 존중심이다.

'지금 바로 이곳'의 나에게 주어진 여건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긍정함으로써 생겨나는 생산적 힘이 곧 감사하는 마음인 것이다.

그것을 삶의 바탕으로 삼는다면 나보다 나은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 불편부당한 힘을 쓰거나 부적절한 행위를 일삼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나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나눔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상실하고 있는 것,그리고 우리 사회가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누구나 감사하는 마음,나누는 마음으로 올 추석을 뜻깊게 보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