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 사건이 사회 전반을 뒤흔들고 있는 가운데, 신씨가 근무한 성곡미술관에 대한 후원 과정에 의혹이 제기되면서 기업의 메세나 활동도 위축되지 않을까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16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그룹과 현대.기아차그룹 등 웬만한 대기업은 물론이요 중견 기업들도 공연, 미술전시회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기업의 문화 후원은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이라는 좋은 취지와 함께 회사 이미지 고양, 마케팅 차원에서도 큰 득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기업들이 신정아씨가 기획한 행사에 대규모 후원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해당 기업들은 외압설에 휘말리며 큰 곤욕을 치르고 있다.

신씨 사건을 계기로 기업의 잣대 없는 '선심성' 지원은 문제가 있으며, 문화 예술 지원에도 장기적인 관점의 전략과 원칙, 더욱 투명한 절차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 기업 메세나 활동 백태(百態) = 삼성그룹은 작년 문화예술계 498억원, 스포츠계 72억원 등 570억원을 문화예술, 체육 지원에 사용했다.

후원은 주로 기업 이미지 제고에 도움이 되고 국가 차원의 문화예술 및 스포츠 진흥을 위해 꼭 필요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소외돼 지원이 적은 분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그룹 측은 설명했다.

현대.기아차그룹은 지난해 사회공헌에 총 520억3천900만원을 투입, 이 중 문화예술 활동에 74억5천200만원을, 체육진흥 활동에 73억8천700만원 등을 썼다.

특히 현대차는 'Hㆍart'라는 브랜드 아래 문화예술 지원 활동을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LG그룹은 LG아트센터가 중심이 돼 기업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는 독창성, 작품성을 감안하고 특히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은 문화예술 분야를 중심으로 검토를 거쳐 지원대상을 결정한다.

LG그룹은 지원 규모 등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SK그룹은 올해 그룹 전체의 사회공헌활동 예산 1천100억원 중 100억-120억원을 문화 예술 사업에 지원하고 있다.

SK그룹은 경쟁력이 있지만 낙후돼 있는 국악과 그룹의 정보통신 이미지에 부합하는 디지털 미디어 아트 부문에 대해서는 별도로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한화그룹은 작년 문화예술 활동 165건, 43억여원을 지원했다.

오지 초등학교 어린이 초청 교향악축제와 저소득층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 지방도시 공연 등 공익성과 대중성이 최우선으로 고려되는 선정기준이다.

포스코는 외부 문화 예술 행사를 후원, 협찬하는 동시에 자체적으로 다양한 행사를 기획, 주최하고 있다.

후원보다는 대치동 포스코센터나 포항의 효자아트홀 등에서 진행하는 자체 행사 비중이 더 크다는 게 포스코의 설명이다.

금호아시아나는 금호문화재단을 통해 음악, 미술, 장학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음악 분야 후원에 힘을 쏟고 있다.

금호문화재단의 1년 예산 규모는 60억원 정도인데 이 중 10억원 정도를 후원 사업에 쏟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음악 분야 후원의 경우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외부의 음악계 인사와 교수 등으로 구성된 인사위원회를 통해 후원할 연주자를 선정한다.

대한항공의 경우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문화 예술 분야 유명 인사에게 퍼스트 클래스 항공권을 지원하고 있다.

유통업체들은 외부 단체에 금전적 지원을 하거나 특정 유명인을 후원하기보다는 직접 문화ㆍ예술행사를 기획하거나 화랑, 공연장 등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롯데그룹은 각 지점별로 롯데화랑을 운영하며 해마다 '개관 기념전', '해외특별 교류전' 등을 통해 국내외 유명ㆍ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신세계도 외부 예술 단체를 지원하기보다는 비정기적 후원요청에 응하거나 자체 기획 문화행사를 진행하는 편이다.

◇ "메세나 하기 무서워요" = 그러나 기업들이 애초 후원할 때의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후원 대상에 흠결이 발견되거나 예상치 못한 악재가 발생했을 때 역풍을 맞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이번 신정아씨 사건이다.

대우건설은 박세흠 사장(현 대한주택공사 사장) 재직 시절인 2004년부터 2006년까지 3년간 성곡미술관에 모두 2억9천만원의 후원금을 지원한 것으로 밝혀져 이 과정에서 신씨와 '특별한 관계'로 알려진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외압이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기아자동차도 작년 7월 성곡미술관이 기획한 '존 버닝햄 40주년 기념전'과 같은 해 11월 '알랭 플레셔전' 등을 후원한 것으로 알려져 난처한 입장이다.

존 버닝햄 40주년 기념전 때는 티켓구매 1천만원, 티켓 광고에 따른 1천만원 등 모두 2천만원을 지원했다.

포스코는 알렝 플레셔전에 1억원을 후원했다.

회사 관계자는 "한.불 수교 120주년을 맞아 성곡미술관측이 '한.불 수교를 기념한 사진전을 개최한다'고 제안서를 보내와 후원키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업들이야 후원을 부탁받고 좋은 취지로 그에 응했을 뿐이라는 입장이지만, 신정아씨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의심을 받는 지금 상황에서는 의혹의 장대비를 피하기 힘든 상황이다.

대한항공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유명 인사에 대해 항공권 후원을 하고 있지만 '불운'이 겹친 경우다.

대한항공은 배아줄기 세포 연구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에게 10년간 국내외 전노선 최상위 클래스 무료 이용권을 줬지만 이후 조작 파문으로 빛이 바랬다.

또 대한항공은 올해 초 인기 가수 '비'에 대한 항공권 지원과 더불어 여객기에 비의 모습을 형상화한 래핑까지 했지만 최근 '비'의 해외 공연이 취소되면서 기대했던 것만큼의 후원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한편 신정아 사건을 계기로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에도 장기적인 전략과 일관된 원칙, 더욱 투명한 절차가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신씨 사건에서도 후원 부탁을 받은 기업 고위 임원이 임의로 판단해 후원 결정을 내린 경우가 목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그렇다고 후원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기업이 별도 인력과 부서를 만들 수도 없지 않느냐"며 "무엇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문화 예술계가 자정의 노력을 해 제2의 신정아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