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까치밥 남겨두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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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시인 >
'그렇지! 그 당시에 나는 늙은 걸인들에게 모자를 벗어 들고 인사를 해야 했었고,또 그들은 그것을 나와 마찬가지로 아주 자연스럽게 여겼지.그것에 대해 조금도 별다른 좋은 느낌을 가지지 않았어.'
프랑스의 작가 조르주 베르나스의 말이다.
베르나스의 말대로 어떤 동정심이나 유별나게 자선을 베푼다는 의식 없이 걸인들을 자신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으로 대접할 수 있었던 시대가 우리에게도 있었는지 모른다.
유년 시절 내가 살던 마을에도 거지가 있었다.
한 주일에 한 번씩 그는 외할머니 댁을 찾아오곤 했다.
그가 사립문을 열고 들어오는 시간은 늘 우리의 아침 식사가 막 끝난 무렵으로 일정하게 정해져 있었다.
그날 따라 식사가 끝난 뒤에도 상을 치우지 않고 있던 할머니는 그가 나타나자 기다리던 손님이라도 맞듯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어서 오시게' 하고 존댓말까지 섞어가며 환대를 하였다.
그러면 그는 깍듯이 답례 인사를 하고 느긋하게 수저를 들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느긋했던지 어린 나는 그의 수저질에서 일종의 기품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는데,거지 주제에 그 꼴이 어지간히 가당찮게 보였던 것 같다.
그에게선 정말 아무리 뜯어봐도 밥을 얻어먹는 자의 황송함과 감사함 같은 것을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당당하고 자연스러웠던지 그가 가족의 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어느날 늦잠을 잔 나는 그와 함께 밥을 먹어야 하는 황당한 사태에 직면하고 말았다.
거지와 함께 밥을 먹다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저 냄새나는 거지와 함께 겸상을 한단 말인가! 나는 그 부당함을 호소했고,말이 먹히지 않자 아주 울먹이기까지 했다.
내 하는 짓이 마냥 귀엽다는 듯 허허허 너털웃음을 짓는 그에게 급기야 '이 거지 새끼야,빨리 꺼져!' 하고 숟가락을 내던지기까지 했다.
그날 나는 벌로 하루종일 밥을 굶어야 했다.
지금도 사립문까지 그를 배웅하며 '아이를 잘못 키운 내 죄가 크네.자네가 넓게 이해해 주시게'하고 쩔쩔매던 외할머니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애가 커서 뭐가 되려나,자못 심각한 눈빛으로 걱정스레 나를 지켜보던 이모님들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생각하면 그때 외할머니 댁은 결코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외할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고,외삼촌마저 요절한 뒤로 날로 가계에 그늘이 짙어가고 있었다.
그런 형편에도 외할머니는 거지의 밥 끼니를 매번 알뜰하게 챙겨주었던 것이다.
그것을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와 의무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거지를 대하는 데 있어서 딱히 내 외할머니만이 유난했던 것 같지는 않다.
일주일에 한 번밖에 오지 않았던 것을 보면,당번제 비슷한 형식으로 온 마을 사람들이 그 거지의 끼니를 돌아가며 보살펴 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거리에서 거지 하나가 얼어 죽어도 모두 내 책임이다'라는 유마경의 말이 있지만,그때 고향 마을 사람들이 그랬다.
그들은 그 거지를 보살피듯 가난한 집들을 서로 보살필 줄 알았다.
새들의 먹이로 까치밥 몇을 남겨두는 마음,추수 때 빈들에 부러 알곡 몇을 흘려 들짐승들의 주린 배를 염려하는 마음,소풍 가는 아이에게 고수레 고수레 김밥 하나를 먼저 던져주어야 한다고 가르치던 그 한결같은 마음으로 세상 모든 목숨붙이들과 가진 것을 나눌 줄 알았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가난을 비참과 모멸의 대상으로서만 바라보게 되었다.
가난을 개인의 무능력과 나태함 탓으로만 돌리며,그 사회적 모순에 대해선 애써 외면하려 든다.
티베트의 라다크 같은 곳에서 근대화가 시작된 최근에야 비로소 '가난'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을 보면, 그것은 아마도 속악한 자본주의 사회의 허물일 가능성이 크다.
유년 시절 부끄러운 기억과 함께,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의 말을 가만히 되짚어 본다.
'자선이란 가난한 사람에게 허리를 굽히는 것이 아니라,가난한 사람의 수준으로 자기를 들어올리는 일이다.'
'그렇지! 그 당시에 나는 늙은 걸인들에게 모자를 벗어 들고 인사를 해야 했었고,또 그들은 그것을 나와 마찬가지로 아주 자연스럽게 여겼지.그것에 대해 조금도 별다른 좋은 느낌을 가지지 않았어.'
프랑스의 작가 조르주 베르나스의 말이다.
베르나스의 말대로 어떤 동정심이나 유별나게 자선을 베푼다는 의식 없이 걸인들을 자신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으로 대접할 수 있었던 시대가 우리에게도 있었는지 모른다.
유년 시절 내가 살던 마을에도 거지가 있었다.
한 주일에 한 번씩 그는 외할머니 댁을 찾아오곤 했다.
그가 사립문을 열고 들어오는 시간은 늘 우리의 아침 식사가 막 끝난 무렵으로 일정하게 정해져 있었다.
그날 따라 식사가 끝난 뒤에도 상을 치우지 않고 있던 할머니는 그가 나타나자 기다리던 손님이라도 맞듯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어서 오시게' 하고 존댓말까지 섞어가며 환대를 하였다.
그러면 그는 깍듯이 답례 인사를 하고 느긋하게 수저를 들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느긋했던지 어린 나는 그의 수저질에서 일종의 기품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는데,거지 주제에 그 꼴이 어지간히 가당찮게 보였던 것 같다.
그에게선 정말 아무리 뜯어봐도 밥을 얻어먹는 자의 황송함과 감사함 같은 것을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얼마나 당당하고 자연스러웠던지 그가 가족의 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어느날 늦잠을 잔 나는 그와 함께 밥을 먹어야 하는 황당한 사태에 직면하고 말았다.
거지와 함께 밥을 먹다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저 냄새나는 거지와 함께 겸상을 한단 말인가! 나는 그 부당함을 호소했고,말이 먹히지 않자 아주 울먹이기까지 했다.
내 하는 짓이 마냥 귀엽다는 듯 허허허 너털웃음을 짓는 그에게 급기야 '이 거지 새끼야,빨리 꺼져!' 하고 숟가락을 내던지기까지 했다.
그날 나는 벌로 하루종일 밥을 굶어야 했다.
지금도 사립문까지 그를 배웅하며 '아이를 잘못 키운 내 죄가 크네.자네가 넓게 이해해 주시게'하고 쩔쩔매던 외할머니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애가 커서 뭐가 되려나,자못 심각한 눈빛으로 걱정스레 나를 지켜보던 이모님들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생각하면 그때 외할머니 댁은 결코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외할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고,외삼촌마저 요절한 뒤로 날로 가계에 그늘이 짙어가고 있었다.
그런 형편에도 외할머니는 거지의 밥 끼니를 매번 알뜰하게 챙겨주었던 것이다.
그것을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와 의무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거지를 대하는 데 있어서 딱히 내 외할머니만이 유난했던 것 같지는 않다.
일주일에 한 번밖에 오지 않았던 것을 보면,당번제 비슷한 형식으로 온 마을 사람들이 그 거지의 끼니를 돌아가며 보살펴 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거리에서 거지 하나가 얼어 죽어도 모두 내 책임이다'라는 유마경의 말이 있지만,그때 고향 마을 사람들이 그랬다.
그들은 그 거지를 보살피듯 가난한 집들을 서로 보살필 줄 알았다.
새들의 먹이로 까치밥 몇을 남겨두는 마음,추수 때 빈들에 부러 알곡 몇을 흘려 들짐승들의 주린 배를 염려하는 마음,소풍 가는 아이에게 고수레 고수레 김밥 하나를 먼저 던져주어야 한다고 가르치던 그 한결같은 마음으로 세상 모든 목숨붙이들과 가진 것을 나눌 줄 알았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가난을 비참과 모멸의 대상으로서만 바라보게 되었다.
가난을 개인의 무능력과 나태함 탓으로만 돌리며,그 사회적 모순에 대해선 애써 외면하려 든다.
티베트의 라다크 같은 곳에서 근대화가 시작된 최근에야 비로소 '가난'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을 보면, 그것은 아마도 속악한 자본주의 사회의 허물일 가능성이 크다.
유년 시절 부끄러운 기억과 함께,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의 말을 가만히 되짚어 본다.
'자선이란 가난한 사람에게 허리를 굽히는 것이 아니라,가난한 사람의 수준으로 자기를 들어올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