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전문 집단소송꾼들에게 우리 기업만큼 만만한 상대도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내 기업들의 경우 수출 비중이 높아 항시 집단소송 가능성에 노출돼 있는 데도 엄격한 미국의 반독점법이나 집단소송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대비책마저 주먹구구식이라는 얘기다.

검증 안된 외국변호사를 썼다가 낭패를 보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 벌고 뒤로 새는' 구조적인 모순을 해결할 방안이 시급한 실정이다.


◆일단 질러 놓고 보는 미국의 전문소송꾼들

미국 기업들도 집단소송만 좇아다니는 '원고전문 변호사들'(plaintiff lawyer)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이들은 1~2명의 피해자라도 모은 뒤 일단 자비로 소송을 제기했다가 승소하면 50% 이상의 높은 성공보수를 챙긴다.

본인들의 이해관계가 걸려있기 때문에 웬만해선 피고와 합의보기를 꺼려하는 점도 이들의 특징이다.

때문에 터무니없는 소송도 적지 않다고 한다.

국내 모 은행의 경우 외국기업 국내지점에 대출해줬다가 이 기업이 망하면서 미국 투자자들을 대리한 소송꾼들의 집단소송에 말려들었다.

부실기업에 대출해줘 투자자를 현혹시켰다는 게 소송의 이유.손해배상 요구액이 무려 1조원에 달했으며, 3년 동안 피말리는 공방전을 벌여야 했다.

무선전화기를 수출하는 기업도 한 고객이 벨소리에 귀가 멀었다고 소송을 제기해 결국 3만달러에 합의봤다고 한다.

김갑유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영국에서는 성공조건부 보수가 비도덕적이라고 해서 불법이지만 미국에서는 성업 중"이라며 "우리 기업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울며겨자먹기로 이를 방어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며 집단소송제의 폐해를 우려했다.


◆대책 없는 한국기업들만 '봉'

더 큰 문제는 국내기업들의 허술한 대응 방식.대부분 기업들이 "사건이 터질 경우 현지 변호사를 고용하면 된다"거나 "하자있는 제품은 리콜하면 되지"라는 식의 안이한 사고에 빠져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현지에서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미국 변호사나 소송전문 로펌을 찾아 전문성이나 의사 소통 여부와 무관하게 일을 맡기다보니 간혹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국내 건설회사가 괌에서 8년에 걸쳐 방어했지만 결국 패소한 게 대표적 사례다.

김갑유 변호사는 "미국 변호사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라며 "변호사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높은 도덕성을 지녔다고 생각해선 안된다"고 충고했다.

국내 반도체 기업의 불법행위와 관련해 미국 측과 소송을 진행 중인 김범수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다행히 사건 초기부터 관여했기 때문에 미국 로펌과 대등한 입장에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며 "명확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대응전략을 짜기 위해선 국내외 사정에 밝은 한국 변호사들을 고용하는 것이 필수"라고 힘줘 말했다.


◆전문가들 조언

담합 등 집단소송의 꼬투리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 물론 최선의 방책이다.

익명을 요구한 모 변호사는 "정부의 행정지도가 많은 규제분야에서 담합 친화적인 시장구조가 만들어진다"며 "특히 금융, 통신 등 암묵적인 카르텔이 상당히 고착화된 업종의 경우 경쟁사 임직원과의 접촉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며 주의를 촉구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미래에셋생명,삼성생명,동양시멘트 등에 집단소송 교육을 다녔다는 이석준 변호사는 "외국계 기업처럼 '경쟁사 접촉에 관한 지침'을 서둘러 만들 필요가 있다"며 "경쟁사 임직원들과 불가피하게 미팅을 갖더라도 가격 얘기가 나오면 무조건 나와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밖에도 김범수 변호사는 이메일 등 전자문서 관리에 특별히 유의할 것을, 김갑유 변호사는 기업별로 노출된 리스크 정도를 파악해 사전에 법률 검토를 받을 것을 강조했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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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어풀이 ]

집단소송

기업 제품이나 서비스의 하자로 유사한 피해를 본 사람이 여럿 있을 때 일부 피해자가 전체를 대표해 제기하는 소송을 말한다.

고엽제소송,유방성형소송,석면소송,담배소송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대한항공의 경우 유나이티드항공 일본항공 등과의 암묵적인 합의하에 여객운임을 올렸다가 소송을 당했다.

판결의 효과는 소송 당사자뿐만 아니라 피해자 전체에 미친다.

따라서 손해배상 규모가 천문학적인 액수에 달할 수 있다.

하지만 소송이 남발되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다.

최근 미국 의회가 집단소송을 어렵게 만드는 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국에서는 2005년 소수주주의 권익보호를 목적으로 증권분야에만 이 제도가 도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