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相浩 < 한국투자증권 사장 jamesryu@truefriend.com >


나는 유달리 겨울을 좋아한다.

특히 요즘처럼 열대야에 잠 못 이루는 한여름에는 쨍하고 추운 겨울 날씨가 더더욱 그리워진다.

이는 더위에 약하고 땀이 많은 내 체질 탓이기도 하겠지만 눈을 좋아하는 내가 겨울이 주는 차분함과 낭만을 즐기기 때문이리라.

이는 내 분위기하고도 맞았는지 대학 시절 친구들이 붙여 준 별명도 겨울이 어울린다고 소위 '겨울남자'였다.

그 시절 나는 겨울만 되면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가슴이 설레곤 했다.

이는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다가와 꽤 오랜 기간 먼 발치서 바라만 보던 아내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용기를 내어 결국 지금에 이르렀다.

결혼기념일 외에 지금도 계속 챙기고 있는 기념일이 있으니 이는 바로 아내와 첫 데이트를 한 1월의 어느 날이다.

런던의 겨울은 길고도 음울하기로 유명하다.

6개월 가까이 지속되며 한겨울에는 하루 평균 일조시간이 한 시간밖에 안 되니 런던 하면 사람들이 안개 끼고 어두운 도시를 연상하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짙은 안개에 덮인 템스 강변의 야경(夜景)을 사랑한다.

영화 '애수'에서 로버트 테일러가 워털루 다리 위에서 비비안 리를 그리며 회상에 젖어 있는 장면을 떠올리며 같이 마음을 적시곤 했다.

또 자욱한 안개 속에 코트 깃을 세우고 옛날에 마차길로 쓰이던 런던의 뒷골목인 포도(鋪道)를 걸으며 상념에 빠지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눈이 오는 경우가 거의 없어 아쉽다면 아쉬웠다.

대신 하루 종일 내리는 듯 마는 듯 하는 안개비 때문에 우산이 상비품이었는데 그냥 들고 다니기 뭐해 가방 속에 넣어 다니곤 했다.

이런 날씨 탓에 영국 사람들은 겨울만 되면 태양이 내리 쬐는 남쪽나라로 탈출을 한다.

나도 질세라 크리스마스 휴가는 주로 지중해 연안의 따뜻한 태양을 찾아 떠났지만 눈 덮인 겨울에 대한 동경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지중해 휴양지인 니스에 갔을 때도 6시간 가까이 차를 몰고 샤모니 몽블랑에 가서 눈 구경을 실컷 하고 오기도 했다.

날씨로만 따지면 런던의 여름은 정말 환상이다.

그리 덥지도 않고 건조한 데다 위도가 높은지라 낮이 길어 새벽 4시에 해가 뜨고 저녁 9시가 넘어서야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는가.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골프를 3라운드나 돌 수도 있으니.

하지만 귀국한 후에도 런던의 여름보다 겨울이 더 그리워지는 것은 역시 내 취향 때문이리라.그러고 보니 런던에 가본 지가 꽤 됐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어둠이 짙게 드리운 런던에서 자욱이 깔린 안개를 밟으며 술 한잔으로 내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던 30대의 그 시절을 회상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