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주요 도시의 백화점을 다니다 보면 임신한 쇼핑객들이 자주 눈에 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고 현지 사람들은 말한다.

산업도시 뒤셀도르프에서 가장 큰 병원 중 하나인 카이제르 베르테 디아코니 병원에서도 아기 울음 소리가 늘었다.

지난 상반기에만 이 병원의 출산율은 전년동기 대비 16% 증가했다.

디벨트지는 '새로운 베이비 붐'이라고 표현했다.

지난해 독일 경제성장률이 6년 만의 최고치인 2.8%로 높아진 데다 출산 장려책을 강화한 덕택이다.

이 같은 독일의 경제 부활은 작년 들어선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공이라는 분석이 자주 나온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기여하고 서방선진 8개국(G8) 의장으로 기후변화 대책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 낸 메르켈의 외교적 성과가 화려하게 부각되면서 경제를 호전시킨 에너지원 역시 그녀의 개혁 정책이었을 것이라는 게 외부의 막연한 평가다.

하지만 현지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오히려 전임 정부인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부가 추진한 경제사회 개혁 프로그램인 '아젠다 2010'이 열매를 맺기 시작한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쉬운 고용과 쉬운 해고를 축으로 한 노동시장 개혁,창업을 늘리기 위한 경제 활성화 조치,연금재정 안정 등이 당시 슈뢰더가 '독일병'을 치유하기 위해 제시한 개혁 프로그램이었다. 2004년부터 이 프로그램이 본격 시행됐다. 그러나 당시에는 구조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과 경기부진 지속으로 슈뢰더의 지지도가 오히려 크게 하락,2005년 11월 물러나게 된다.

이를 이어받은 사람이 메르켈이다. 그리고 이듬해 세계 경제에 훈풍까지 불면서 독일 경제는 드라마틱한 재기에 성공,자연스럽게 메르켈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메르켈이 슈뢰더의 개혁 정책을 되돌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에서 그의 공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성장의 원동력은 2~3년 지나면서 효과를 내기 시작한 슈뢰더의 개혁 정책이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데카뱅크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울리히 케이터는 "2006년 초 경기가 회복되고 있었지만 전년의 3배 수준인 2.8%까지 튀어오를 것으로 전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며 "슈뢰더 정부의 개혁 정책과 순환적 세계경기 호전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수출과 투자가 급증했다"고 분석했다. 실업자도 지난 6월 380만명으로 작년 월평균 448만명보다 현저히 줄었다.

사실 슈뢰더가 '아젠다 2010'을 발진하기 전부터 노동 시장에는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997년 일이다. 독일 노동자 임금이 종업원 10인 이상 기준 시간당 22.76유로로 프랑스 노동자의 22.80유로 밑으로 떨어졌다. 그 전까지는 정반대였다. 바뀐 흐름이 지속되면서 독일 기업은 프랑스 기업보다 임금 비용을 적게 부담하게 됐다. 추가 임금 인상 없이 근무 시간을 연장한 폭스바겐 모델도 그즈음 확산됐다. 2006년 독일 경제성장률이 프랑스를 따라잡고 향후 2~3년간의 전망치도 높게 나오는 것은 10년 전부터 계속돼 온 허리띠 졸라매기와 슈뢰더의 노동 개혁이 이뤄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국은행 런던 사무소 나상욱 차장은 "독일 기업의 경쟁력이 좋아진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임금 상승 억제가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인내의 기간이 너무 (?) 길었나. 잘 참아 오던 독일 근로자들이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독일 국영 철도회사인 도이체반의 기관사 노조가 시위의 깃발을 올렸다. 기관사 노조인 GDL은 임금 31% 인상을 요구하며 4.5%로 타협해 달라는 정부의 만류를 뿌리치고 8일부터 전면 파업을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노조원 90% 이상의 찬성까지 얻어냈다.

메르켈 정부는 도이체반의 부분 민영화까지 발표해 놓은 상태다. 적자 투성이인 도이체반의 노선 확충이나 경영 효율성 제고를 위해 민간의 자금 수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노조의 파업은 구조조정을 수반하는 민영화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의 악셀 웨버 총재는 "내년에는 근로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가 분출할 것"이라며 "그것이 물가 안정을 해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어렵게 이뤄낸 성장의 과실 배분 문제가 독일 경제의 순항에 암초로 등장했다.

런던.파리.프랑크푸르트=고광철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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