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이슬러 인수를 발표하면서 서버러스의 존 스노 회장(전 미국 재무장관)은 크라이슬러를 '미국의 아이콘(우상)'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미국 자동차 산업의 힘을 믿는다"고도 했다.

크라이슬러는 제너럴모터스(GM) 포드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빅3' 중 막내다.

GM과 포드에 비해 20년 정도 늦게 출발했지만 1960년대 혁신적인 자동차 개발로 세계 시장을 주름잡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비틀거리기 시작한 크라이슬러는 위기와 회생을 반복하는 질곡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크라이슬러의 창립자는 월터 크라이슬러.증기기관차 기계공에서 GM 산하의 뷰익 사장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그가 뷰익을 나와 1919년 자동차 독자 모델을 개발하면서 크라이슬러의 역사는 시작된다.

1925년 정식 회사로 설립된 크라이슬러는 1928년 닷지 브라더스사를 인수하면서 덩치를 급속히 키웠다.

1930년대엔 시장점유율이 20%대까지 뛰었다.

당시 크라이슬러는 뉴욕 맨해튼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크라이슬러 빌딩을 세우기도 했다.

미국 자동차산업의 '빅3' 체제가 확립된 것도 이때다.

크라이슬러의 급성장 비결이 합병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선진적 기술과 디자인이 뒷받침됐다.

한 세대를 풍미했던 포드의 T형 승용차가 검정색 일색이었던 것과 달리 크라이슬러는 빨강· 파랑색의 파격적인 차를 만들었다.

마차 같은 형태의 자동차뿐이었던 당시 비행기에서 힌트를 얻어 유선형의 신형차 '에어프로'도 출시했다.

이 차를 GM과 포드가 앞다퉈 흉내내기도 했다.

경주차에 뿌리를 둔 '닷지 차저'를 개발,1960년대 미국식 스포츠카인 '머슬카' 붐을 일으킨 것도 크라이슬러였다.

승승장구하던 크라이슬러에 먹구름이 낀 것은 1970년대 오일쇼크 탓이었다.

원유값이 급등하자 기름을 많이 먹는 대형차 인기는 급락했다.

대형차가 밀려난 자리를 연비 효율이 좋은 일본의 중소형차들이 메웠다.

특히 대형차 의존도가 높았던 크라이슬러엔 치명적이었다.

일본차의 공세로 도산 위기에 몰린 크라이슬러는 라이벌 포드의 최고경영자였던 리 아이어코카를 사장(이후 회장 승진)으로 영입해 돌파구를 찾는다.

아이어코카는 '일본차 두들기기'를 주창하며 미국 정부로부터 자동차 수입 규제와 자금 지원 등을 받아냈다.

이는 크라이슬러의 회생 발판이 됐다.

하지만 근원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GM이나 포드에 비해 브랜드 파워가 떨어지는 크라이슬러는 일본 차에 밀려 시장점유율이 계속 떨어졌다.

다시 위기를 느낀 크라이슬러는 1998년 독일의 다임러 벤츠와 '세기의 합병'을 해 재기를 시도했다.

말이 합병이지 사실상 다임러에 흡수된 것이었다.

크라이슬러의 위기 원인에 대해선 갖가지 분석이 있다.

우선 미국 내 자동차 산업의 위상 변화다.

미국 산업의 주역이 정보기술(IT)과 금융 등으로 옮아가면서 정부와 국민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작년 11월 빅3 경영진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만나 '엔 약세의 시정'을 요구했지만 대통령은 시큰둥했다.

연비가 좋은 일본 차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저항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크라이슬러의 경우 퇴직자나 종업원의 의료비 등을 부담하는 소위 '레거시(legacy) 비용'이 지나치게 무거워 공적 의료보험이 있는 일본 자동차사와 경쟁이 안된다는 지적도 있다.

전문가들은 예전과 달라진 크라이슬러의 모습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는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애널리스트인 앱슨 리비는 "1984년 출시한 미니밴과 같은 새로운 개념의 자동차 개발에 소홀했던 게 크라이슬러 위기의 진짜 원인"이라고 말했다.

실제 크라이슬러가 자동차 신 시장을 연 역사는 세계 첫 미니밴을 투입한 1984년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소형차나 하이브리드차 등의 개발엔 늘 뒤졌다.

크라이슬러의 위기는 끊임없는 혁신으로 히트차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회사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교훈을 보여준 것이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