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회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AMA) 시상식이 열린 지난해 11월21일.내로라하는 유명 연예인들 틈바구니 속에서 한 한인 기업이 LA 셜라인 오디토리움을 가득 메운 현지 언론의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었다.

카메라의 초점은 여인철 사장(47) 이 이끄는 '헤어닥터스펠라'.'그들만의 리그'로 통하는 AMA에 2만5000여개 회사들과의 경쟁을 뚫고 12개 협찬사 가운데 하나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이날 여 사장의 기능성 헤어 드라이어인 '제이드 에어(Jade Air)'는 NBC,인터치(in Touch) 등 150여개 현지 언론을 통해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생중계됐다.

그것도 '제이드 에어'를 선물로 받고 기뻐하는 비욘세,애쉴리 윌즈,패리스 힐튼의 모습과 함께."임정협 LA상공회의소 회장이 100년 한인 이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해 주더군요.

그 때만 해도 지금 어떤 일이 내게 일어나고 있는지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상상치도 못한 일들이 현실이 됐거든요."

여 사장의 '성공 신화'는 6년 전인 2001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7년 교보생명에 입사해 관악·동작 통합 지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당시 '최연소 지점장'이었으니까 나름대로 능력을 인정받았어요." 그러다 뜻하지 않은 제안이 1월 말께 미국으로부터 날아왔다.

"미국에서 사업을 하던 친동생이 대장암 판정을 받았다는 겁니다.

제수씨가 혼자 힘으론 어렵다고 도움을 요청해 왔어요.

그 때 제 나이 만으로 서른아홉이었죠.마흔 넘어서는 내 사업을 하겠다는 꿈이 저를 이끌더군요.

때마침 명예 퇴직 바람이 불길래 첫번째로 사표를 냈습니다."

빠른 결정만큼 미국 생활을 위한 준비도 신속했다.

"평소 탈모 시장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탈모 클리닉 센터를 운영 중이던 박효석 스펠라 회장을 찾아가서 무작정 미국 전역에 스펠라 깃발을 심겠다고 도움을 요청했죠.다행히 박 회장께서 저를 믿고 3000만원 상당의 장비와 프로그램을 무료로 제공해줬습니다."(여 사장은 2003년 스펠라가 종근당에 흡수될 때 독립했으나 박 회장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지금까지도 스펠라라는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

퇴사 후 보름 만에 미국 LA로 날아간 여 사장은 3개월 정도 동생 사업을 마무리하는 데 보내고 '헤어닥터스펠라'라는 탈모 클리닉 센터를 시작했다.

"처음 3년여간은 교민들이 주 고객이었어요.

탈모 클리닉이라는 게 미국인에겐 생소했던 모양입니다." 돌파구를 찾던 여 사장은 '할리우드를 뚫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LA에 1호점을 낸 것도 할리우드의 '별'에게 통하면 세계 어디에 내놔도 팔릴 것이란 계산을 했습니다." 하지만 타향땅에서 여 사장에게 인맥은 현지 교민과 일부 단골뿐이었다.

"단골들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죠.자세히 보니까 그 중엔 꽤 '거물'도 있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미용업계는 한인이 주름잡고 있었잖아요.

그래서인지 할리우드에 끈이 닿아 있는 분이 있더라고요." 그 거물 중의 한 명이 할리우드 시상식 총괄 기획사의 레스 페리 사장을 소개해줬다.

그와의 만남은 훗날 '천우신조'의 기회가 될 터였다.

가능성을 확인한 여 사장은 2005년 클리닉센터에서 쓰던 기능성 헤어드라이어 '제이드 에어'를 상용화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천연옥을 내부에 장착하는 기술에 대해 국내에서 실용실안을 얻고 구미에 소재한 '베스트로지스'란 회사를 통해 5월부터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을 시작했습니다.

원적외선과 음이온(91.6%) 성분이 머리를 윤기 있게 만들어주는 제품으로 품질엔 자신이 있었습니다." 다만 판로가 문제였다.

"14년 보험맨의 정신을 살려 무작정 할리우드 스타가 찾는다는 LA시내 30곳의 미용실을 돌아 다녔습니다.

185달러짜리 드라이어가 먹힐 곳은 이곳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완전히 '날품팔이'와 다름 없었습니다." 인종차별,문전박대 등 몇 개월간 온갖 수모를 겪었다.

"동양인은 예약조차 힘들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한 번 사용해 본 헤어디자이너들로부터 반응이 오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해서 17곳의 미용실과 납품 계약을 맺은 겁니다."

2006년 6월 여 사장에게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단골이 돼 있던 레스 페리가 AMA 시상식에 스폰서 기업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느냐며 추천서를 써줬습니다.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시상식을 찾은 할리우드 스타와 정·관계 인사들에게 제공할 선물을 협찬해 주는 것인데 여기에 '입성'하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였으니까요."

실제 일본의 유명 화장품 회사인 시세이도도 6년을 기다린 끝에 제 34회 AMA 시상식에 스폰서 기업이 될 수 있었다.

"30명의 심사위원들이 3개월 정도 꼼꼼히 실사를 하더군요.

그러고 나서 드디어 10월16일에 최종 12개 회사 중 하나로 선정됐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헤어닥터스펠라가 힐튼호텔,버라이존,캐딜락,야후,시세이도 등 쟁쟁한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순간이었다.

유럽과 미국산만 득실대던 곳에 한국의 미용 제품이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자 현지 언론들은 헤어닥터스펠라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NBC의 'Today Show'에선 '2006년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상품'으로 '제이드 에어'를 선정했다.

"15초 광고에 70만달러를 내야하는 방송에 1분15초 동안 제이드 에어가 등장했으니 '놀랠 노자'였죠." 여 사장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일들이 불과 몇 달 사이에 일어난 셈이다.

헤어닥터스펠라는 올해 연 매출 100억원을 바라보는 중견 기업으로 자랐다.

헤어 클리닉 센터도 LA에만 5개에 뉴욕과 시애틀까지 뻗어나갔다.

하지만 여 사장은 요즘도 새로운 사업을 위한 준비에 한창이다.

올 7월 'Dr.GQ'라는 헤어·뷰티 전문 기업을 한국과 미국에 선보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비달사순의 수석 헤어 디자이너인 수지(Shuji Kida)와 폴미첼 출신의 DQ(본명은 Harold Ho)가 합작을 하자는 제의를 해왔어요.(수지는 영화 '가위손'의 실제 모델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비달사순이나 폴미첼에 버금가는 뷰티·헤어 브랜드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