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일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 >

외국인 투자고충처리 업무를 담당하던 사람이 들려 준 이야기다. 미국투자자가 한국에 투자할 생각으로 관공서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무엇인지 살펴 보았더니 법규정엔 한 줄밖에 없더란다. 행정절차가 간소하구나 하면서 쾌재를 부른 이 투자자가 서류를 제출하고 나니까 추가서류를 내라는 연락이 왔단다. 요구하는 대로 서류를 구비해 가져다 주었더니 한참 후 지금까지 제출한 서류로는 판단이 안 서니 보충자료를 더 내라고 연락이 왔다. 이 투자자는 이번이야말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자료를 모아서 제출하고 투자승인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기대는 섣부른 것이었다. 이 투자자는 또 다른 자료 제출을 요구 받았고,이번에는 마지막이겠지라는 심정으로 자료를 제출했다. 하지만,관공서는 규정에 있지도 않은 자료를 계속해서 요구했고 이 투자자는 인내심이 바닥에 달해,한국에서 철수해 버렸다. 좌절에 빠진 이 사람이 투자지로 선택한 곳은 싱가포르. 그 곳은 무려 10여페이지에 달하는 제출서류 목록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명시된 모든 자료를 제출했더니 더 이상의 자료 제출 요구 없이 투자승인이 떨어졌단다.

한국이 새로 집권하는 대통령마다, 규제를 개혁하고 투명성을 증대해 경제환경을 선진화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할 정도로 실망스럽다. 경쟁상대국들보다,OECD 다른 회원국들보다 외국인직접투자가 훨씬 미진한 한국에 대한 외국인들이 가장 큰 불만은 정부정책과 관행의 예측불가능성이다. 한·미FTA가 한국경제의 선진화에 기여할 수 있는 통로의 하나가 투명성 제고이다. 로비로 얼룩져 소비자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제약업계의 관행을 개선할 수 있는 이의신청제기 절차 설립도 그 좋은 예이다. 또 한·미FTA협상이 타결된 이후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독소조항'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투자자-정부 중재 제도 역시 투명성 제고 경우에 해당한다.

모 유력일간지와 30명의 국제통상전문가들이 공동으로 행한 최근 설문조사를 보면 전문가들은 한국경제 선진화를 위해 꼭 필요한 제도로 '투자자-정부 제소'를 들고 있다. 이런 전문가의 시각과 반대집단의 시각은 아직 평행선을 긋고 있다. 지난 주 필자가 출연한 어떤 방송에서는 투자자-정부 중재 제도를 "미국투자자가 한국행정부를 국제기관에 제소할 수 있는 제도"라고 소개하는 편향성을 보였다. 투자자-정부 중재 제도는 한국투자자가 미국 행정부를 상대로 국제기관에 제소할 수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한국의 대미 투자가 미국의 대한 투자의 절반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방송은 "이 제도를 수용했기 때문에 미국 투기자본의 경영손실을 보상해 주어야 한다"는 전혀 사실과 맞지 않는 설명으로 필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 제도는 정부가 외국인투자자만을 겨냥해 비상식적인 차별조치를 취해 재산권에 근본적인 손실을 끼칠 때 보호받아야 마땅한 그 훼손된 투자를 보호한다는 것이 많은 사례로 입증되었다. 이번 협상 결과는 이를 다시 확인했음에도 불구,여전히 앵무새처럼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알 수 없다.

투자자-정부 중재제도야말로 한국경제 운영의 투명성을 획기적으로 제고할 수 있는 제도이다. 불투명하고 자의적인 규제남발로 외국인투자를 경쟁상대국으로 내몰아 투자를 위축시키고 일자리를 만들어 내지 못해 서민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 후진적인 한국의 정책 환경을 선진화하기 위해 투자자-국가 중재 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굳이 투자자-국가 중재 제도가 독소조항이라고 우긴다면,아마 이 제도 도입으로 인한 최고 피해자는 공무원들이 아닐까. 법과 규정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공무원의 규제권한과 자의성이 상당히 감소되기 때문이다. 한·미FTA에서 한국이 수용한 많은 제도들은 미국제도를 압력 때문에 수용한 것이 아닌,글로벌스탠더드를 받아들여 경제제도와 관행을 선진화하려는 전략적인 선택이다. 힘의 논리가 아닌 선진화와 개혁의 논리이다.